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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월남전 참전이야기(2).....나트랑 하늘엔 포성만 은은히 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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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6-08-01 14:11 댓글 0건 조회 3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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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성 100군수사령부가 있던 나트랑이다
지금은 그 넓던 부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사령부 간판이 붙어있던 양쪽 돌기둥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구나.
필~승!!!
백바가지에 전투복을 입은 위병들의 우렁찬 수하소리와
몸앞에 차례총 하면서 철커덕 하는 M16 소총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귓가에 쟁쟁하다.

정문위병소에서 진입하면 209보충대,영헌중대,5통신대,237수송대,
102후송병원,경비중대, 십자성극장,px건물,본부중대,258병참중대,
그리고 파견나온 백마966포대가있다.

정문 왼쪽 언덕위에 절이 있던곳과 월교대 자리는 월맹군전사자
영웅묘지가 들어서 있고 237수자대 자리는 지금 베트남군이 그대로 사용하고
십자성극장도 그대로 남아있다.
102병원자리는 그대로 있으나 병원에서 사용하던 침대와 집기등은 장교구락부로
이용하던곳에 보관되어있다.)






****************
야자수와 포성
****************

뚜우~뚜우~
업셔호는 계속 목쉰 고동을 울리면서 그 육중한 몸체를 예인선에 이끌려
부산항을 뒤로 한다.

20여분 후
예인선이 떨어져 나가고 뿌- 하는 우렁찬 고함과 함께
드디어 25,000톤 수송함은 자체의 엔진으로 굉음을 내며 후미에 엄청난
물줄기를 뿜어대고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저멀리서 간간히 들리던 함성들도 멀어져가고
뱃전에 빨래줄 마냥 걸쳐서 흐느적 거리던 오색 테프들도 하나둘
바닷바람에 떨어져 나간다.

출발 1시간경-
이제 부산항은 완전히 사야에서 살아졌다.
뱃전을 부여잡고 꼼짝도 않고 섰던 장병들중 하나씩 둘씩 선실로 발길을 돌리고
이별이 아쉬운듯 계속 쉰소리를 토해내는 고동소리만 더욱 요란한데
아~아~
이제 가뭇가뭇 멀어지는 저것이 오륙도인가?
하느작 끝자락을 보이더니만 드디어 저렇게 살아져 가 버리는 구나.

마지막 하나 남은 검은점이 완전히 눈앞에서 멀어질동안
나는 미동도 않은채 처음 그자리에 그대로 못박혀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떠오른것은 허연 백발을 흩날리면 눈물짓고 계시는
어머님의 노안(老顔) 뿐-
그리고 울컥 치미는 목메임속에 밀려오는 대한민국이라는
내 조국과 그리운 산하들.의 잔상...

1969년 6월17일 오후 1시
우리는 그렇게 정든 부모형제와 조국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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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선 안에서의 취침점호
함상위에서 매일 한번씩 구명조끼를 입고 조난훈련을 받았다



전대원 식당으로 집합!
선실내 스피커에서 일직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후다닥 복장정돈을 하고 에레베이터앞에 정열.
4층을 타고 더 올라가니 엄청나게 넓은 식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송선은 전체 높이가 10층 빌딩정도만 했고 식당은 한 중간 해수면과
근접한 위치로서 배가 흔들릴때마다 출렁이는 바다표면이
유리창 넘어로 보이는 쾌적한 곳이였다.
메뉴는 커다란 스테이크와 스프.오트밀,포테이토밀 등 서너가지와
후식으로 과일이 급식되었다.
그런데 사과나 포도등은 익히 알고 있는거고 바나나도 먹어보지는 않았으나
껍질을 까서 먹는다는 것은 알았는데
식사때 마다 나오는 노랗고 물렁물렁한 과일은 어떻게 먹는지 아는사람이 없어
어떤이는 통째로 먹는다는니 껍질을 벗긴다느니 의논이 분분하자
마침 선임하사 한사람이 그 먹는 방법을 들어서 알고 있어
우리는 얼굴이 벌개진채로 한참동안 서로 쳐다보며 파안대소 했었는데
그 과일이 바로 난생 처음 보는 오랜지였다.

처음 이삼일 정도는 양식이 신기하고 맛도 있었지만 사나흘 때부터는
설사를 하기도하고 속이 메스꺼워 김치와 고추장 생각이 간절 했다
그런데 1년후 귀국때 보니까 선내에서 밥도 나오고 된장국도 나왔으니
짧은기간동안 많이 개선 된 것이다.

출항 이틀째-
하루 한번씩 상갑판위에서는 구명조끼를 입고
유사시 대피요령및 구조훈련이 있었다.
배 위에서는 축구장이 있어 맹호부대와
우리 십자성부대 사에에 축구 시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 앞쪽의 우리 선실에서 뒷쪽의 맹호 선실까지 가자면 20여분 이 소요됐는데
한번은 돌아오는데 길을 잘못 찾아 반시간을 헤매이기도 했다.

출항 사흘째-
뱃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바다위를 스칠듯이 떼지어
날으는 고기때가 장관을 이루었다
누가 "저거 꽁치 아냐?"하자
"아니 저건 날치야"
"어떻게 알아?"
"날아다니니까 날치지"
"맞다 맞아! 날아다니니까 날치지"
우리는 잠시 시름과 불안을 잊고 어린애마냥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런대 나중 알고보니 그게 정말 날치가 맞았다.

출항 나흘째-
매일 똑 같은 일과가 반복된다.
아침 7시 기상 8시 식사,오전 각종 비디오및 정신교육,12시점심,오후 자유시간.
오후5시 저녁식사,10시 취침점호.
다만 밤 취침점호때 만은 함내 미군 당직사령이 우리 당직 사령과 같이
점호를 하는것이 특이할 뿐-

같은 선실 같은 칸의 바로 윗층 침대에있는 하수영 병장과 금새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그에게 수선이라는 바로밑 여동생이 있다는걸 알았다.
나중 그는 100군수사령부 통신대에 배치되었는데
내가 행정처에 출장갈 때마다 그의 내무반에 가서 일박하곤 했다.
하병장의 동생 수선이하곤 약 넉달동안 펜팔을 했었는데
나중 내가 '널 좋아하는것 같다'고 하자
곧 자긴 '약혼할 애인이 있다'며 편지를 끊었다.
그 친구에게 왜 약혼할 사람이 있다는걸 말 안했느냐고 강력히 항의하자
씩 웃으며 하는 말-
"그동안이라도 편지 잘 주고 받았으면 됐지 뭘더 바래?"

출항 닷새째-
갑짜기 삼단 침대 맨 위층에서 왝! 소리와 함께 악취가 풍기는
구토물이 밑으로 쏟아졌다.
2-3일전부터 멀미를 하던 일병 녀석이 드디어 참지못하고 오바이트를 하곤 저는
그대로 실신해 버리고 만다.
즉시 의무반이 달려왔고 멀미약을 먹은 녀석은 언제 그랬느냐는듯
태연히 다시 잠을 청했다.

출항 엿새째-
상갑판에서 오음리에서 같은 내무반에서 훈련을 받았던
맹호부대 오소용 병장을 만났다.
키가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그는 슬쩍 웃을때 덧니가 인상적이였다.
내일이면 서로 갈라져 언제다시 만날찌 기약없는 전우로서 마지막 조우였다.
후식으로 나온 콜라로 건배하며 서로 고향 주소를 주고 받고 무운장구를 빌었다.
묵호(지금 동해)가 집이였는데 아버지가 고깃배를 타신다고 했다.
굳게 악수를 하고 씩씩하게 헤어졌다.
그런데 오병장은 파월 두달만에 전사 했다.
퀴논 근처 어디 전투였다고 했다.

출항 일주일째 새벽5시경
뚜우~
오랜만에 업셔호는 우렁찬 기적을 토해냈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해안선에는 그림에서만 보던 야자숲이
새벽안개에 어른거렸고 철석이는 파도소리 사이로
이따금씩 쿠웅~쿠웅~하는 포성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순간 잿빛 하늘에는 쌔액!소리와 함께 F4 팬텀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살아진다.

전원 따불빽 메고 갑판으로 집합!
맹호는 대기하고 십자성만 나트랑에 하선!
10명 단위로 끊어서 상륙정으로 승선!
정신 빠싹 차리고!
긴장 풀지 말고!

드디어 우리는

혼돈의 전쟁터 베트남(VIETNAM)에 도착 한것이다.

이때가
1969년 6월24일 오전 7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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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고의 휴양도시인 나트랑 에는 접안시설이 없어서
수륙양육정으로 해안가 모래바닥에 하선
월남땅에 첫발을 디뎠다.

하선지에서 100군수사령부까지 트럭으로 이동.
앞뒤에는APC장갑차가 호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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