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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월남전쟁 참전이야기(7).....불타는 정글-오작교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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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6-09-01 13:48 댓글 0건 조회 5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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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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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정글을 헤치며 걸어가자 숲사이로 작은 봉오리 같은것이 보였다.
월맹군의 본부가 있는 40고지였다.
3소대는 옆길로 돌아 이미 고지 부근에 도착 했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다음 날이밝자
내가 위치한 조그마한 고지 아래서는 적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명,3명, 혹은 10 여명이 무슨일인지는 알수없으나 주변을 살피기도하고
마을쪽으로 향하기도 했다.
어떤 무리는 팬티바람에 탄띠를 차고 나무와 풀로 위장했다.
이것은 그들이 월맹정규군이며 이곳이 그들의 기지임을 말해 주는 것이였다.

적진에 들어와 있다는 이 야릇한 감정-
흥분된 나는 중대기지에 무전을 쳤다.
"야! 베트콩이 바글바글 하다..."

첫번째 교전은 다음날 새벽 0시05분에 일어났다.
고지 왼쪽날개에 매복시켰던 전일구 소대장이 적과 조우하여 적 3명을 사살했다.
다음날 확인결과 그중 한명은 기밀문서를 한가방 가득 휴대한 적의 장교였다.
그는 산길을 내려오다가 3소대병사가 크레모아 격발기를 누르자
그만 하체가 날아가 버렸다.
또 한 명은 두개골이 깨져서 뇌수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밤을 정글에서 매복한채 조금의 긴장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살기위해서 소리없이 씨레이션을 까먹으며 밤을 새웠다.
그날 저녁 2소대 매복지점으로 또다시 10여명의 베트콩들이 접근하는것이 관측되었다.
나는 무전으로 소대장에게 월맹군이 접근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호랑이...적이 접근한다."
"안 보입니다"
"200m야.... 100m,,,이제 50m다! 야! 눌러라! 눌러!"
"중대장님! 이 씨팔새끼들이 우리 크레모아 뒤로 지나갔습니다.
즉시 크레모아 방향을 돌려 놈들이 올때까지 치겠습니다"
그런데 잠시후,그곳에서 난데없이 요란한 폭음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불길한 예감으로 몸전체에 전류가 흐르는것을 느꼈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야! 이새끼야!소대장이 모르면 누가 알아? 누가 죽은거야?"
"신음소리는 나는데 옆에있는 선임하사조에서 적을 친것 같습니다"
"신음소리나면 그쪽으로 슈류탄을 까라 해"

2소대 매복조에 쓰러진 적은 5명이였다.

(맹호1연대 재구중대 11중대장 김진선 참전수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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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8일부터 4월18일까지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2개사단을 동시에 투입하여

파월사상 처음으로 군단 규모의 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맹호부대의 전술책임지역 남단 송카우(Song cau)로부터

투이호아(Tuy hoa)지역에 위치한 백마부대 지역 북단까지

62km의 1번 도로를 연결하기 위하여 도로 주변 일대에서 준동하는

월맹정규군과 베트콩의 거점을 포착 섬멸하는 한국군 파월이래

최대규모의 포위공격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 지역은 정글과 암석지대로 형성된 호지명 통로로 연결된 베트콩들의 보급기지이며

그들이 숨어 지낼 수 있는 천연의 요새로써 활동의 본거지였다.

과거에 연합군들이 평정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판단은 하였지만

작전에 의한 공격기도는 생각지도 못 할만큼 베트콩들의 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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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와 백마의 전투부대는 진격을 거듭하여 작전을 수행한 끝에

1967년 4월 18일 작전개시 42일만에

"오작교"라고 명명되어진 다리에서 서로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국군은 약 73,000명의 월남주민을 적들의 통치속에서 해방시키고

401km의 1번 도로를 연결시켰고, 인구 120만의 6,800평방 km의

월남정부 통치지역으로 확보해 준 것이다.


오작교 작전에서 우리가 올린 전과는

적사살 939명, 포로 425명, 귀순 297명, 소화기 681정, 공용화기 30문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동 작전중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23명과 소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월남전사/베트벳 싸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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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개시 42일 만에 남진하던 맹호부대와
북진하던 백마부대 지휘관이 1번도로앞에서 극적 해후하는 순간.



"오작교작전"은 그보다 4개월후인 7월9일에 벌어지는 "홍길동작전"과 함께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벌린 월남전 2대합동작전이였다.

투이호아에 배치된지 한달쯤 되였을까
토요일 일조점호가 끝나고 전원 부대내 야자수극장에 집합명령이 내렸다.
사령부에서 특별정훈필림이 내려왔는데
사병 장교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대대장님의 엄명이었다.

대한뉴-우스가 나오고
곧바로 전투장면이 펼쳐졌다.
곳곳에서 포탄이 작열하고
헬기의 기관총소리와 소총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사살되는 베트콩의 모습과 부상에 나뒹그러지는 아군병사들의 모습이
그대로 여과없이 화면을 메꾼다.
허름한 임시다리위에서 맹호부대장과 백마부대장이 만면에 웃음을 띈채
악수를 나눈다,
그 뒤 자막을 수놓는 전과현황-
적사살 000명,포로 000명, 귀순000명.....
이른바 <오작교작전> 이었다.

맹호,백마,청룡등 한국군은 월남에서 파월후부터 1973.1.31.까지
대대급 이상인 대부대작전 1,173회 중대급 이하인 소부대작전 576,362회를 실시했다.
그중에서도 오작교작전은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 하면서도
전과면에서는 타작전과 비교할수 없으리만치 혁혁했다.
이 작전 덕으로 내가 파월된 12개월동안 우리부대는 물론이고
인근 백마부대도 베트콩의 이렇다할 기습없이 안전한 임무수행을 할수 있었다.
특히,악명높은 혼바산 1번국도도 비교적 안전하게 물자및 병력수송을 할수있었으니
오작교작전 이야말로 우리 따이한의 용맹성을 베트남은 물론 세계에 널리
떨칠수있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작전이였다.


국방부가 제작한 "오작교작전"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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