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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월남전쟁 참전이야기(8).....고국에서 온 위문공연단과 웃고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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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6-09-08 10:33
댓글 0건
조회 718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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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극장과 고국위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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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이강과 다뇽강이 합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곳-이곳 투이호아 해변에
백마 도깨비 28연대와 우리 십자성 12군수가 자리잡았다.
지금은 그 곱던 해안가 백사장은 자취도 없고 듬성듬성 나있는 풀무더기와
파헤쳐진 모래둔덕만 남았을뿐...
멀리 희미하게 저주의 '혼바산'이 유령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저앞 야자수 우거진 저곳이 우리 부대와 투이호아시내 사이에 위치한
'푸뉴'마을이고....꽁까이 보러 몇번 갔었는데...
전투는 시도때도 없이 벌어진다.
어제까지 부모형제 친구들의 편지를 몇번이나 읽어보며 그리움을 달래던 전우가
오늘아침 헬기에 탑승하고 작전지역으로 출동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냉혹무비한 현실-
잘때도 깨여있을때도 잠시도 긴장을 놓칠수없는 전선의 나날들-
병사들은 어느새 파김치처럼 지쳐갔다.
머릿속은 텅 비어 백치가 되고
가슴속은 타버려 푸석한 재만 남았다.
1년이라는 기간은 상상할수 없으리만치 길었다.
내일을 기약할수없는 전쟁터의 삶이란 하루가 여삼추마냥 초조하고 지루했다.
작전이 없는 날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더라도 또다른 두려움이 밀려온다.
정신적인 공황에서 오는 불안감이다.
대대급이상 각 부대에는 어김없이 극장이 마련돼있다.
덜렁 지붕만 있는 야외극장이지만 그래도 앉을 계단은 만들어져 있었다.
하루일과가 끝나고 어둠이 혼바산을 내려누를무렵
병사들은 하나둘 부대내 야자수극장으로 모여든다.
찌르륵 찌르륵 하는 영사기 소음과함께 화면이 온통 거미줄투성으로 낡았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기척도 없이 화면을 응시한다.
"임약국집 딸들" "마부" "두만강아 잘있거라"등등 1650년대 낡은 필름이지만
재미있다.
간혹 미군 에어베이스에서 빌려온 허리우드영화는 자막도없이 돌아가지만
병사들 누구하나 불평이 없다.
비디오는 꿈도꿀수없던 시절이다.
영화상영은 작전이 없어 비상만 걸리지 않으면 매일 상영됐다.
한달에 두번씩 고국에서 위문단이 공연을 왔다.
위문단이 오는날이면 부대전체가 흥분된 분위기로 들떴다.
대대장은 장교식당에다 특별 회식장을 마련하고 공연이 끝난 위문단과
밤늦도록 만찬을 베풀었다.
어떤날은 장교숙소에서 새벽에 나오는 무희들을 당번병이 과장차로
그들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것을 보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혈기방장하고 가족이 있는 젊은 장교들이 무려 1년간이나 금욕을 한다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발생할수도 있고 혹시라도 현지인들과의 접촉이라도있어서
또다른 문제를 야기 시킬수있다고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위문단에 접대부를 포함시켰다는 얘기도 흘러 나왔다.
주월한국군 최초의 위문공연은 1965년 파월된 그해 말부터 시작되었다.
캄란에 상륙한 '귀신잡는 해병' 청룡부대가 11월초부터 12월하순까지
나트랑서북방 일대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벌린 <번개1-2호작전>을 끝냈을때
시인 '모윤숙'씨가 이끄는 '송춘희' 후랭키 송' '동방성애'등 10여명의 인기 연예인단이
부대를 방문했다.
공연이 끝나고 이들 연예인들과 장병들이 무대위에서 서로 얼싸안고 '동백아가씨'를
합창할땐 장내는 고국에 두고온 부모형제를 그리는 사나히들의 목메인 울음이
그칠줄 몰랐다.
(인근 도깨비극장은 시설면에서는 우리 야자수극장과는 비교도 되지않을만큼 좋았다.
보통 위문단이 오면 먼저 사령부에서 공연하고 다음으로 도깨비부대 그다음으로
우리대대로 오곤했다.
"노란샤스입은 사나히"의 '한명숙'씨는 공연시 앵콜을 수십번이나 받고 나중에는
연대장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장병들에게 그만 마치자고 사정을 하는 일도 있었다)
'남진'도 오고 '나훈아'도 다녀갔다.
특히 '남진' 씨는 1968년7월 청룡부대로 파월되어 최전선인 '호이안'에서
소대 소총수로 복무했었으므로 같은 파월장병들의 심리를 잘 알고있어
위문공연단에 열성으로 참여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는 내가 파월돼있는동안 두번인가 다녀갔었다.
그녀가 무대에 올라오면 장내는 온통 휘바람의 도가니였다.
그런 호응에 답해서 이미자씨는 한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무려 열곡에서
열다섯곡 이상씩 메들리로 불렀다.
어떤때는 스무곡이상을 불러 나중에는 목이쉬어서 다음 공연에
출연치 못했다는 말도 들렸다.
청아하고 구슬픈 그녀의 노래소리가 투이호아 밤하늘을 울려퍼질때
장병들은 너나없이 흥분의 도가니속에서도 고국에 두고온 부모형제 생각으로
눈시울이 붉어지곤했다.
한번은 또깨비극장 위문공연장에 부상환자들와 간호장교가 함께 관람을 왔다.
사회자가 노래신청을 받자 미이라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붕대를 칭칭감은
환자 한명이 휄체어에 앉은채 무대위로 나와서 목메인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곡명이 "울려고 내가왔나"였다.
노래부르는 병사도 울고 수백명의 관람병사들도 따라 울었다.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것은 스트립쑈였다.
무대위의 무희가 흐느적거리는 쎅스폰음율에 맟춰 하나씩 옷을 벗을때마다
알수없는 탄식소리가 극장안을 울렸다.
공연이 끝날즈음엔 어느 위문팀이나 예외없이 모두무대에 나와 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그렇지 않아도 울적한 병사들을 한바탕 울렸다.
파월 초기에는 베트콩들의 포사격의 표적이 된다하여
훤한 주간에 영화나 위문공연이 있었다고 한다.
오음리에서 훈련이 거의 끝날즈음에 위문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부대에서 무려 두시간이나 걸어서간 임시 공연장은 완만한 비탈을 낀 산골짜기
였는데 세시간의 공연은 거의 광란의 도가니였다.
마지막 출연한 정훈희는 병사들과 무대위에서 어깨동무를 한채로 아리랑을 합창
했던것이 기억나기도 한다.
파월되어서
100군수사령부에 대기병으로 있을때 십자성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본것도 생각난다.
그때 영화제목이' 단종애사' 였던가?
.
.
.
.
일주일 전
강릉에 살고있는 '장석근' 참전전우의 전화가 왔다.
그는 39기동문으로 청룡부대 1대대 3중대 2소대에서 근무하다가 무사히 귀국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다고 하니 졸업하자마자 지원하여 해병대에 입대한 모양이다.
파월시 방카 지붕위에 앉아서 찍은 사진 두장과 국가보훈처에서 발급받은
'참전용사증'도 보내왔다.
그리고 이 참전이야기를 쓰는데 참조하라고 제목이 'WAR(전쟁)'라는 책도 함께 보냈다.
작가인 김창동씨 역시 1968년 청룡부대 소총수로 파월되어 자신이 겪은 전쟁의 황페함을
회고형식으로 기록한 장편소설이였다.
읽는동안 가슴이 격해지고 내내 눈물이 돌았다.
전쟁의 비참함은 겪는 당사자는 물론이려니와 뒤에 남겨진자의 아품 또한 이에
못지않음이 직접 그 전쟁터를 다녀온 내 가슴에 너무나 깊히 공감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회되면 그 이야기도 적어볼 생각이다.
장석근 전우는 강릉 농협중앙지점에 과장으로 현직에 있다.
이 지면을 통하여 고마움을 표시한다.
국방부제공-위문공연 외 동영상
야자수극장과 고국위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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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이강과 다뇽강이 합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곳-이곳 투이호아 해변에
백마 도깨비 28연대와 우리 십자성 12군수가 자리잡았다.
지금은 그 곱던 해안가 백사장은 자취도 없고 듬성듬성 나있는 풀무더기와
파헤쳐진 모래둔덕만 남았을뿐...
멀리 희미하게 저주의 '혼바산'이 유령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저앞 야자수 우거진 저곳이 우리 부대와 투이호아시내 사이에 위치한
'푸뉴'마을이고....꽁까이 보러 몇번 갔었는데...
전투는 시도때도 없이 벌어진다.
어제까지 부모형제 친구들의 편지를 몇번이나 읽어보며 그리움을 달래던 전우가
오늘아침 헬기에 탑승하고 작전지역으로 출동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냉혹무비한 현실-
잘때도 깨여있을때도 잠시도 긴장을 놓칠수없는 전선의 나날들-
병사들은 어느새 파김치처럼 지쳐갔다.
머릿속은 텅 비어 백치가 되고
가슴속은 타버려 푸석한 재만 남았다.
1년이라는 기간은 상상할수 없으리만치 길었다.
내일을 기약할수없는 전쟁터의 삶이란 하루가 여삼추마냥 초조하고 지루했다.
작전이 없는 날이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더라도 또다른 두려움이 밀려온다.
정신적인 공황에서 오는 불안감이다.
대대급이상 각 부대에는 어김없이 극장이 마련돼있다.
덜렁 지붕만 있는 야외극장이지만 그래도 앉을 계단은 만들어져 있었다.
하루일과가 끝나고 어둠이 혼바산을 내려누를무렵
병사들은 하나둘 부대내 야자수극장으로 모여든다.
찌르륵 찌르륵 하는 영사기 소음과함께 화면이 온통 거미줄투성으로 낡았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기척도 없이 화면을 응시한다.
"임약국집 딸들" "마부" "두만강아 잘있거라"등등 1650년대 낡은 필름이지만
재미있다.
간혹 미군 에어베이스에서 빌려온 허리우드영화는 자막도없이 돌아가지만
병사들 누구하나 불평이 없다.
비디오는 꿈도꿀수없던 시절이다.
영화상영은 작전이 없어 비상만 걸리지 않으면 매일 상영됐다.
한달에 두번씩 고국에서 위문단이 공연을 왔다.
위문단이 오는날이면 부대전체가 흥분된 분위기로 들떴다.
대대장은 장교식당에다 특별 회식장을 마련하고 공연이 끝난 위문단과
밤늦도록 만찬을 베풀었다.
어떤날은 장교숙소에서 새벽에 나오는 무희들을 당번병이 과장차로
그들의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것을 보았다는 얘기도 들렸다.
혈기방장하고 가족이 있는 젊은 장교들이 무려 1년간이나 금욕을 한다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발생할수도 있고 혹시라도 현지인들과의 접촉이라도있어서
또다른 문제를 야기 시킬수있다고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위문단에 접대부를 포함시켰다는 얘기도 흘러 나왔다.
주월한국군 최초의 위문공연은 1965년 파월된 그해 말부터 시작되었다.
캄란에 상륙한 '귀신잡는 해병' 청룡부대가 11월초부터 12월하순까지
나트랑서북방 일대의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벌린 <번개1-2호작전>을 끝냈을때
시인 '모윤숙'씨가 이끄는 '송춘희' 후랭키 송' '동방성애'등 10여명의 인기 연예인단이
부대를 방문했다.
공연이 끝나고 이들 연예인들과 장병들이 무대위에서 서로 얼싸안고 '동백아가씨'를
합창할땐 장내는 고국에 두고온 부모형제를 그리는 사나히들의 목메인 울음이
그칠줄 몰랐다.
(인근 도깨비극장은 시설면에서는 우리 야자수극장과는 비교도 되지않을만큼 좋았다.
보통 위문단이 오면 먼저 사령부에서 공연하고 다음으로 도깨비부대 그다음으로
우리대대로 오곤했다.
"노란샤스입은 사나히"의 '한명숙'씨는 공연시 앵콜을 수십번이나 받고 나중에는
연대장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장병들에게 그만 마치자고 사정을 하는 일도 있었다)
'남진'도 오고 '나훈아'도 다녀갔다.
특히 '남진' 씨는 1968년7월 청룡부대로 파월되어 최전선인 '호이안'에서
소대 소총수로 복무했었으므로 같은 파월장병들의 심리를 잘 알고있어
위문공연단에 열성으로 참여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는 내가 파월돼있는동안 두번인가 다녀갔었다.
그녀가 무대에 올라오면 장내는 온통 휘바람의 도가니였다.
그런 호응에 답해서 이미자씨는 한번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무려 열곡에서
열다섯곡 이상씩 메들리로 불렀다.
어떤때는 스무곡이상을 불러 나중에는 목이쉬어서 다음 공연에
출연치 못했다는 말도 들렸다.
청아하고 구슬픈 그녀의 노래소리가 투이호아 밤하늘을 울려퍼질때
장병들은 너나없이 흥분의 도가니속에서도 고국에 두고온 부모형제 생각으로
눈시울이 붉어지곤했다.
한번은 또깨비극장 위문공연장에 부상환자들와 간호장교가 함께 관람을 왔다.
사회자가 노래신청을 받자 미이라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붕대를 칭칭감은
환자 한명이 휄체어에 앉은채 무대위로 나와서 목메인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곡명이 "울려고 내가왔나"였다.
노래부르는 병사도 울고 수백명의 관람병사들도 따라 울었다.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것은 스트립쑈였다.
무대위의 무희가 흐느적거리는 쎅스폰음율에 맟춰 하나씩 옷을 벗을때마다
알수없는 탄식소리가 극장안을 울렸다.
공연이 끝날즈음엔 어느 위문팀이나 예외없이 모두무대에 나와 아리랑을 함께 불러서
그렇지 않아도 울적한 병사들을 한바탕 울렸다.
파월 초기에는 베트콩들의 포사격의 표적이 된다하여
훤한 주간에 영화나 위문공연이 있었다고 한다.
오음리에서 훈련이 거의 끝날즈음에 위문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부대에서 무려 두시간이나 걸어서간 임시 공연장은 완만한 비탈을 낀 산골짜기
였는데 세시간의 공연은 거의 광란의 도가니였다.
마지막 출연한 정훈희는 병사들과 무대위에서 어깨동무를 한채로 아리랑을 합창
했던것이 기억나기도 한다.
파월되어서
100군수사령부에 대기병으로 있을때 십자성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본것도 생각난다.
그때 영화제목이' 단종애사' 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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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강릉에 살고있는 '장석근' 참전전우의 전화가 왔다.
그는 39기동문으로 청룡부대 1대대 3중대 2소대에서 근무하다가 무사히 귀국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다고 하니 졸업하자마자 지원하여 해병대에 입대한 모양이다.
파월시 방카 지붕위에 앉아서 찍은 사진 두장과 국가보훈처에서 발급받은
'참전용사증'도 보내왔다.
그리고 이 참전이야기를 쓰는데 참조하라고 제목이 'WAR(전쟁)'라는 책도 함께 보냈다.
작가인 김창동씨 역시 1968년 청룡부대 소총수로 파월되어 자신이 겪은 전쟁의 황페함을
회고형식으로 기록한 장편소설이였다.
읽는동안 가슴이 격해지고 내내 눈물이 돌았다.
전쟁의 비참함은 겪는 당사자는 물론이려니와 뒤에 남겨진자의 아품 또한 이에
못지않음이 직접 그 전쟁터를 다녀온 내 가슴에 너무나 깊히 공감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회되면 그 이야기도 적어볼 생각이다.
장석근 전우는 강릉 농협중앙지점에 과장으로 현직에 있다.
이 지면을 통하여 고마움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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