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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기 아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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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넘 작성일 2006-06-20 22:26 댓글 0건 조회 6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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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만큼 어린 시절 믿음을 주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술을 마시며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 막노동에 지쳐 잠든 아이의 손 한번 제대로 잡아 주지 못했던 아버지, 힘겨운 삶이 싫다고 집을 뛰쳐나간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들 때문에 말다툼하시던 아버지, 흉년으로 끼니가 어려울 때면 늘 수심 가득한 얼굴로 지내시던 아버지, 당당하게 살라며 용기를 주던 아버지, 이 모든 형태의 아버지들, 때로는 작고 왜소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은 믿음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어린나이의 아이들에게 믿음의 시작이며 끝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내가 처음 아버지라는 낱말을 이해하고 바라보았던 모습은 가슴에 근육이 불거져 나왔고, 팔은 굵은 힘줄로 세상에서 가장 힘 센 한 분이셨다. 그 힘으로 들에 나가 김을 매고, 저녁이면 어스름한 시골 산길을 소에게 줄 풀을 잔뜩 짊어지고 내려오던 모습에 취하곤 하였다. 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집앞의 한길로 나서곤 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이 놈의 자식 뭐 하러 또 나왔냐?"며 나무라곤 하셨다. 봄이면 봄을 일구기 위해 땅을 괭이로 파셨고, 여름이면 곡식이 잘 자라라고 김을 메셨으며, 가을이면 듬직한 어깨는 여물게 익은 곡식을 지고 커다란 산처럼 들어오셨다. 겨울이면 집에서 새끼를 꼬거나 봄에 쓸 쟁기를 손질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 뒷뜰에 쌓으며 사셨다.

아버지가 눈을 부라리며 나무라면 무서웠고, 어쩌다 마을에 큰 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얻어 오신 과자부스러기라도 주면 한 없이 좋았다. 시골의 인심은 늘 아버지를 취하게 만들었으며, 가끔은 취한 몸으로 어두운 산길을 오시다 길 아래로 구르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손에는 자식들에게 주려고 무언가를 꽉 쥐고 계셨었다. 이렇게 자식들을 사랑하며 키우셨던 아버지의 희망은 바로 자식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쩌면 그 꿈과 희망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강하고, 뜨겁고, 부드러우며, 절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희망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리며, 가을의 결실을 얻는 마음으로 수십년을 버티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어릴 때 절대적인 믿음의 산이셨던 아버지, 오늘이 그 아버지의 67회 생신이었다. 오늘 아침과 점심만 함께 있었고 지금은 성남에서 글썽이는 눈물을 머금으며 이 글을 쓰고있다. 강원도 영월땅 깊은 곳에 지금 자리를 펴고 쓸쓸히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계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바쁘다는 핑계로 휴일인 어제 모여 생일상을 차려드리고 저녁엔 모두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 혼자 아버지와 아침을 맞았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도랑물 흐르는 소리에 일어난 아침은 싱그럽기만했다. 아버지 또한 한놈의 자식이라도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웃으신다.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주름살이 깊게 박힌 아버지의 검게 그을은 얼굴, 그것은 내가 어릴 때 믿고 달려나갔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는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약해지신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에게 "많이 야위셨어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혹시나 마음마저 약해지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침 상을 차려드리고 함께 식사를 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야기하는 틈틈이 아직 건강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곤 했다.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버지는 여전히 장가를 가지 않은 나의 앞일만을 걱정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그 흔한 보약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가슴은 미어질 듯이 아파왔다. 밥상을 물리고 일어서 어린 시절 놀던 배나무 아래서 실컷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목구멍으로 밥알을 삼키는 시간이 지나고나서 흐르는 도랑으로 나갔다. 물소리에 마음을 달랬다.

3남5녀 가운데 그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주는 둘째 아들인 나에게 아버지는 애정이 많으셨나보다. 말 없이 계시다가도 내가 가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덜 하셨겠지만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좀 더 행복하실 아버지, 그 분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적적함 마저도 잠시 달래주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어릴 때처럼 재롱이라도 떨며 안겨드렸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쑥스러움으로 그냥 마루에 앉아 달아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손짓을 하고 "오늘 날씨가 무척 덥네요"라는 말로 너스레를 떨었다.

오후가 되어 집을 나서며 아버지의 모습을 또 보았다. 맑은 웃음, 나의 삶을 걱정하는 말씀이 또 이어졌다. "몸 조심해서 일 열심히 잘하고 살아라" 그리고는 내가 뜀박질쳐 학교에 가던 언덕까지 따라나오시며 뒷모습을 바라보셨다. 그 언덕은 아버지가 자식들을 떠나 보내는 이별의 언덕이자 기다림의 언덕이었다. 늘 그곳에서 학교에 가거나 돌아오는 자식들을 보내고 기다리셨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 내가 떠날 때도 그러셨다. 아버지의 언덕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언덕에서 쓸쓸히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기 싫어 내리 달렸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야 되돌아 보았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언덕이 그렇게 높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오르려고 해도 도무지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언덕, 그곳이 아버지의 언덕이었다. 커다랗기만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곳에 덩그런히 남아 있었다.

97. 6. 30 月山 康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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