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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기 세상사는 이야기(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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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검정고무신 작성일 2006-02-18 15:23 댓글 0건 조회 6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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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늬덜은 좋기두 허것다. 서방 잘 만나 호강허구..."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내의 목소립니다.

"살어 생전에 저런데 가서 칼 질 한번 해 보면 여한이 읎것네."

도대체 무슨 장면인가 싶어 거실에 나가 TV를 보니 중년의 부부가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 와인을 곁에 놓고 양식을 맛있 게 먹고 있는 장면이였습니다.

 

"나는 이 집구석 와서 맨날 김치 쪼가리에 무 꽁다리와 싸움만 했지

생전 저런 걸 구경이나 해 봤남."

아내는 제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아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양식은 아무나 먹는 중 알어?

저것두 다 격식이 있는 겨."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뒷동을 달았습니다.

"어련허시것어. 세상에 격식 몰라서 양식 못 먹는 멍청이 있으면 나와 보라구 그랴.

전부 당신 같은 주변머린 중 아나베."

아내는 입 안에 잔뜩 고였던 말을 이때다 싶게 쏟아 냈습니다.

 

"남에 집 서방들은 주말이면 스텍끼를 먹을래, 생선회를 먹을래 해 가메

가족들 데리구 잘두 다니더먼 이 집구석은 겨우 헌다는 소리가

격식 몰러 못 먹는다는 풍월이나 읊구 있으니..."

 

결국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티격태격 해 가며 수원까지 올라가 기어코 양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먹고 왔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혼이 쏙 빠진 식사였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자마자 문제는 시작됐습니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습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을 들여다 보니 우선 눈에 띄는 게 스테이크였습니다.

아내가 그렇게도 노래를 하던 스테이크는 메뉴판 제일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등심 스테이크루 합시다."

아가씨가 다시 묻습니다.

"알겠습니다. 스테이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머뭇거리고 있자 아가씨가 눈치도 빠르게 우리 속을 알아차리고 앞서 말합니다.

"라이트, 미듐, 하드가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을 쳐다 보니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눈만 껌뻑거리며

저만 바라 보고 있을 뿐이였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음식인데 아무것이면 어떠랴 싶어 얼결에 말했습니다.

"라이트루 허쥬."

한숨을 끄면서 이제 됐나 싶었는데 그 아가씨가 다시 묻습니다.

"손님. 스테이크 소스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참고로 저희 레스토랑에서는 브라운 소스와 키위 소스가 준비 돼 있습니다."

 

가만히 종업원 아가씨의 말을 들으니 양식(洋食)의 양자(洋字)도 모르는

촌뜨기 들임을 알고 뒤끝에 토를 달아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종업원 아가씨의 배려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듣고만 있던 아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키위가 좋을 것 같은디..."

아마도 키위라는 귀에 익은 말이 들렸던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키위소스로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스프는 뭘로 드릴까요?"

이렇게 묻기 시작한 것이 무려 10여 가지가 넘었습니다.

스프는 뭘로 할거냐. 셀러드 드레싱은 뭘로 할거냐. 디저트며 차는 뭘로 할 것인가 등등...

 

한참을 기다린 끝에 우리는 빵을 먹고 스프를 먹고 그리고 기다리던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저를 힐끔힐끔 쳐다 보던 아내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조금 잘르다 말고

기겁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아니. 날 것을 가져오면 어쩐댜."

"날거라니? 고기가 안 익었단 말여?"

혹시나 해서 부리나케 나이프로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라 보니

채 익지도 않은 시뻘건 고기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바뻐두 그렇지. 손님상에 날 고기를 내 오면 어쪄자는 겨?"

그때 마치 우리 테이블 옆으로 종업원 하나가 지나가길래 불러 세웠습니다.

"이 스테이크가 안 익은 것 같은디..."

종업원은 테이블 한 쪽에서 종이를 꺼내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님. 손님께서 주문하신 스테이크가 맞습니다."

"글쎄. 스테이크는 맞는디 워찌 덜 익었느냐 그거여..."

종업원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거져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두번의 스테이크가 바뀌고 나서야

바삭하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손 닦으라고 내 온 대접의 물까지 알뜰하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내가 말했습니다.

"한식은 숭늉을 주는디 양식은 멀건 냉수를 주는구먼 그랴..."

 

집에 돌아 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워쪄? 내일 또 한번 갈 텨?"

아내는 진저리 치는 시늉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차라리 그 돈으루 삼겹살 사다가 구워 먹구 말지....

어쨌거나 호강 한번 잘 했네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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