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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기 위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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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6-11-07 23:10 댓글 0건 조회 1,0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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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 팬티가 한참 유행하던 그해
제 나이 여섯 살 이였습니다.

앞집에 사는 머슴아가 저를 좋아했었는지
해만 뜨면 저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괴롭혀댔습니다.

어느 겨울 아침
우리 집 앞마당에 함박눈이 수북이 내려 앉아 온통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날따라 예쁘게 공주 옷으로 단장시켜주신 엄마 덕분에
여섯 살 난 어린 공주는 눈 덮힌 하얀 세상으로 한껏 자랑하러 나갔습니다.
혹시 멋있는 왕자님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어유~ 우리 인순이 참 예쁘기도 하지.”
“매일 바지 입고 다니기에 머슴아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입혀 놓으니 공주 같네.”
지나가시다 고개를 바짝 치켜든 제 모습을 보신 동네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
으쓱대며 추운 겨울 날씨도 잊은 채 바깥을 배회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앞집에 사는 머슴아가 “아이스깨끼” 하며
제 치마를 들춰보고 내따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너~어 이리 안와.”

“메롱~ 나 잡아봐라.”

약 올리듯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깔깔 웃고 도망치는 머슴아는 바로 앞 집에 살았으며
저보다 한살 연하인 다섯 살의 아이였습니다.

“너 잡히기만 해봐. 가만 안둘 꺼야.”
마치 60년대 멜로 영화를 찍는 듯 징징대며 전 녀석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녀석은 자유롭게 두 팔을 벌리며 비행을 하듯
날개를 펴고 저를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다니던 머슴아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눈을 뭉쳐 저에게 던졌습니다.
“아야! 아파.”
엄살이 아니라 머슴아가 던진 눈 덩어리는 제 이마를 때렸고
이마에서는 이내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알고 보니 눈 덩어리 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 피~좀 봐.”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본 저는 갑자기 독이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전 치마를 입은 공주가 아니었고
독기를 품은 마녀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급한 마음에 집안으로 들어가 무식하게도 연탄집게를 들고 나왔습니다.
제 이마에서 피가 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머슴아 녀석은 마냥 저를 놀려대었고
그에 독이 바짝 오른 저는 연탄집게를 잘 조준하여
녀석의 뒤통수에 내따 던져 버렸습니다.

역시 제 생각대로 명중이었습니다.
제가 던진 연탄집게는 머슴아의 뒤통수에 제대로 꽂혔습니다.
그리고 이내 머슴아의 머리에서도 피가 흘렀습니다.

순간 언제 아펐느냐는 듯
머슴아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전 철없이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어~엄~마~ 으~아~앙.”
머슴아 녀석은 뒤통수를 잡고 울면서 엄마를 불러대며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예상대로 머슴아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의 손을 잡고 저희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얘가 그랬어.”
머슴아 녀석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고 흐느끼며 울어 댔습니다.

“쟤가 먼저 그랬어요. 이것 봐요.”
저는 이마를 들춰 보이며 머슴아 어머니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서로의 신체에서 흐르는 피를 보신 머슴아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녀석을 꾸짖으며 당신네 집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렇게 앙숙 아닌 앙숙으로 한 동네에 지내면서
다음해 전 일곱 살이 되었고 그 머슴아 녀석은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한 여름에 저희 집 집안에 도배를 하신다고 모두 풀칠을 하고 계시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전 꽃무늬 팬티 하나만 달랑 입고 바깥을 빠져 나왔습니다.

“감자 찔 테니 멀리 가지 마라.”
열심히 일하시면서도 엄마는 자식이 눈에 띄셨는지 한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알았어.”
감자를 쪄 놓으신다는 엄마의 말에 저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냥 신이 난 제 발걸음은 까치발 걸음이 되었습니다.

“신작로에 가지마라.”
잠시 후엔 찐 감자를 먹을 생각에 마음마저 들떠있었습니다.
하여 그렇게 일러 주셨던 엄마의 당부도 잊은 채 전 홀랑 신작로 길을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집 앞에 많은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사이로 머슴아 녀석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 건너 다녔습니다.
녀석의 아찔한 장면을 보고 있다보니 어느 새

“인순아! 감자 다 익었다.” 하시며
차 길 건너에서 엄마가 저에게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하셨습니다.

“조심해서 건너와.”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언제 머슴아가 뒤에 와 있었는지
“야 계집애야 빨리 건너 가.” 하고 제 등을 확 떠밀었습니다.

얼떨결에 등을 떠밀린 저는 그만 달려오는 자동차와 부딪혔고
반동에 의하여 다시 차 밑으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차 뒷바퀴에 옆구리가 걸려 자칫 옆구리를 밟고 차가 움직이려는 순간
엄마의 절규하는 소리와 동네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소리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일곱 살 된 여아를 차 밑에서 끌어내는 현장을 목격하신
저의 엄마는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셨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죽은 아이처럼 끌려 나왔답니다.

그 날 집안에 도배를 하려고 작은 아버지께서 함께 계셨는데
아버지께서는 제가 죽은 줄 알고 그 자리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셨고
대신 작은 아버지께서 저를 안고 병원으로 향하셨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치는 중에 기절했던 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고 어린 마음에 엄마를 애타게 찾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죽은 줄만 알았던 저는 큰 사고에 비해 다행히 왼쪽 모든 부분에 찰과상만 입었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뒤에서 저를 밀었던 머슴아 집은 잔뜩 겁에 질려 그 길로 이사를 하였고
아직도 그 머슴아의 소식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저 무탈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어린 시절 연하의 위험한 관계는 여기에서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윤식아!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 지난날이니 너를 다 용서 한다.
이 개구쟁이 머슴아 녀석아!
네가 만약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얼른 내게로 달려와서 사과해라.
먼저 자수하면 내 깨끗이 너를 용서해 줄게. ㅎㅎ

나도 살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정말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인데 만약 내가 죽을 운명이었었더라면 벌써 그때 죽었을 텐데.......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내 아주 오래 살라는 가 보다.
이 모두가 네 덕분이 아닌가 싶다.
네가 내 인생의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나도 들은 이야기이지만 죽을 고비 많이 넘긴 사람은 오래산다고 하더라만
너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니?

보고 싶다. 윤식아!


** 어린시절 - 이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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