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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기 중국4대 미인 왕소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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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백 작성일 2008-01-30 11:28 댓글 0건 조회 1,0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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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王昭君)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

서한(西漢)시대 남군(南郡) 자귀(호북성 자귀) 출신으로 이름은 장이고 자가 소군(昭君)이다. 자귀는 장강삼협에 속하는 곳으로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王昭君(왕소군) 王昭君漢宣帝時匈奴貴族爭奪權 중국 전한(前漢) 말 원제(元帝)의 궁녀. 이름은 장, 자는 소군.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갔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전설화되어 후세에 윤색되면서 널리 전송되었고 시와 희곡의 소재로 널리 쓰였다. 소군출세-왕소군이 변방국(흉노국)으로 나서다-는 중국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된다. 원제는 화공이 올린 초상화를 보고 그녀가 제일 못생긴줄로만 알고 그녀의 초상화에 점을 찍어 흉노족에게 시집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수레에 실려 가는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녀의 미모를 본 원제는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말았다. 그녀가 후궁중에서 제일 가는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원제는 땅을 치며 후회하였지만 이미 결정된 일인지라 번복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된 책임을 물어 그녀의 초상을 실물에 훨씬 못미치게 그린 화공을 죽이고 재산 또한 몰수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고야 말았다..실로 중국인으로서는 애석하게 생각하는 미녀이다. 왕소군의 이 역사적인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오랑캐에게 시집을 가는 왕소군의 마음을 담은 이백의 시이다.
昭君拂玉鞍 원제의 궁녀 소군, 치맛자락으로 구슬 안장 건드리듯..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빰이 우네
今日漢宮人 오늘까진 한궁의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부턴 오랑캐의 첩(妾)
오랑케 땅이라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이백의 또 다른 시이다.
漢家秦地月 한나라 진 땅의 달이
流影送明妃 달 그림자 뿌리며 명비를 보내네.
一上玉關道 한 번 옥문관을 나서더니
天涯去不歸 하늘 끝에 가 다시는 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의 달은 여전히 동해에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쪽 땅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峨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묻히네.
生乏黃金枉圖畵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留靑塚使人嗟 죽어선 청총을 남겨 탄식케 한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는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2년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다. 이도지아사는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왕소군은 한없는 원망과 절망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가(靑家)"라 하였다고 한다. 왕소군을 "명비(明妃)"라고도 칭하는데, 그 이유는 서진(西晋) 시기에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소군(昭君)"을 "명군(明君)"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점점 "명비"라고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 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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