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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기 중국의 4대미인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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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백 작성일 2008-01-30 11:24 댓글 0건 조회 1,2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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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西施)

이태백은 오서곡(烏棲曲)이란 시에서 서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姑蘇臺上烏棲時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吳王宮裏醉西施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吳歌楚舞歡未畢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猶銜半邊日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銀箭金壺漏水多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起看秋月墜江波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東方漸高奈樂何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춘추전국시기에 월(越)나라의 저라산(苧蘿山) 기슭(지금의 절강 제기시) 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하루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를 '침어(沈魚: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것을 감상하던 물고기를 강밑으로 가라앉게 했다는 의미임)'라고 하게 되었다. 또 ≪장자≫에도 그녀의 미모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서시가 마음속의 근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리며 마을을 걷고 있었다. 이마를 찌푸려도 여전히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을 보고, 이 마을의 추녀가 자기도 서시처럼 하면 아름다워 보일까 하여 얼굴을 잔뜩 지푸린 채 걸어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추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춘추시대 후기 제후들의 쟁패의 중심은 장강(長江) 유역 하류와 절강 지역으로 옮겨진다. 이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오나라와 월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다. 월나라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후손이고, 오나라는 주(周)왕실의 속국이었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통치 시기에 오나라는 초(楚)나라에서 귀순한 대신 오자서(伍子胥)와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의 보좌로 국력이 강성해졌다. 이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승리를 눈앞에 둔 순간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 경왕(敬王) 24년 구천(勾踐)이 월나라 왕에 즉위했다. 오왕 합려는 이때를 틈타 월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을 갚고자 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맹장 오자서(고사성어 日暮途遠(일모도원) 참조)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의 도움과 '섶 위에서 잠을 자고[와신(臥薪)]'하는 등 절치부심으로 결국 월왕 구천에게 복수를 하였다. 전쟁에 진 월나라 왕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고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상담(嘗膽)] 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사성어 臥薪嘗膽(와신상담) 참조) 이 과정에서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黎)가 보복을 위해 월나라 최고 미인인 서시(西施)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즉, 전쟁에 패한 월 구천이 승자인 오 부차에게 준 여인이 바로 서시이다. 서시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이니 대략 기원전 500년 정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녀는 땔나무 장수의 딸이었고 선천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서시는 가슴앓이 병이 있었는데 가끔씩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매우 아름다웠지만 눈살을 찌푸릴 때 더욱 아름다워 추녀들로 서시의 행동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고사성어 서시빈목(西施빈目) 참조) 결국 미인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은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게 되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 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적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하기 위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구천은 부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매년 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예물로 바쳤는데, 서시도 그러한 목적으로 오왕 부차에게 바쳐진 미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월나라 대부 범려는 여러 차례 오나라에 미녀를 선사하였음에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직접 전국 각지를 돌면서 절색의 미녀를 찾아 나섰다. 하루는 범려가 저라산(苧蘿山) 기슭에 이르렀는데, 약야계(若耶溪)라고 하는 곳에 두 명의 미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두 미녀는 바로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범려는 그녀들의 자태를 보자마자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세상에 보기드는 보물이 되어 반드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월나라의 미래는 저 여인들에게 달려 있도다!". 범려는 그녀들을 만난 다음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그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서시와 정단은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고, 연약한 시골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중요한 국가의 대사를 맡게 될 줄 몰랐다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을다짐한다. 이에 범려는 회계산 부근에 비밀 장소를 마련하여 미인계를 성공시킬 계책을 체계적으로 준비해나갔다. 여기에는 서시와 정단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미녀 10여명이 더 있었는데, 교육 내용은 먼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상교육을 실시한 후, 그 다음으로 일반적인 지식을 전수하였다. 특히 가무(歌舞), 몸가짐, 예절과 사람을 유혹하는 기교 등을 중점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정보수집 지식과 기술도 필수과목이었다. 이러한 집중적인 교육을 통하여 단기간에 그녀들은 충성심과 고귀한 품성을 갖춘 공작요원으로 양성되었다. 현대적 의미로 말한다면 서시는 바로 유명한 여자 스파이였던 것이다. 서시와 정단은 많은 스승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발군의 재능을 나타내어, 3년만에 가무를 배우고 우아한 자태와 교태로운 정취를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월왕 구천은 이들을 시험한 후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에 범려는 날을 잡아 서시와 정단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범려는 서시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서시도 임신을 한 몸인지라, 두 사람은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배부른 미인을 오왕에게 바칠 수 있었겠는가? 오나라로 가는 도중에 가흥(嘉興)이라는 지방에 이르러 범려는 서시가 풍토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서시는 범려의 아이를 낳았으나, 가련하게도 이 어린 생명은 부모에게 선택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려와 서시는 국난으로 만났다가 국난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부차에게 바쳐진 후 부차는 서시의 미모를 한없이 사랑하였다. 서시는 자신의 신분을 교묘하게 숨겼으며, 부차는 그러한 서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부차는 서시를 위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영암산(靈巖山)에 화려한 관와궁(館娃宮)을 짓고 온갖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또 온갖 궁리 끝에 땅을 파서 큰 옹기를 묻어 평평하게 한 후 그 위를 다시 두꺼운 나무로 덮은 회랑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향리랑(響履廊)'이라 하였다. 서시가 이 향리랑 위를 걸으갈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영롱하게 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공호수를 조성하여 그 주위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고 호수 안에서 배를 띄워 함께 놀 수 있도록 하였다. 서시와 정단의 갖은 애교는 부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이로써 부차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녀들과 함께 가무와 산수를 즐기는데만 열중하였다. 결국 부차는 범려의 계획대로 역대 망국의 군주들이 걸었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복수의 날만 기다리면서, 오나라가 대외 원정을 떠나 군사력을 소진 한 후에 오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마침 서시로부터 오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구천은 그때를 틈타 병력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도우는 척 하면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사 두었다. 그 결과 오나라는 제나라 정벌에 성공하였으나, 오나라 상국(相國) 오자서는 월나라마저 파멸시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월나라에서도 이러한 오자서가 그들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월나라에서는 이 오자서를 없앨 궁리를 하였다. 오자서의 제거 계획이 마련되자 그것은 서시의 임무가 되었다. 서시는 갖은 교태를 부리며 오왕 부차에게 오자서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차는 서시의 말에 속아 오자서의 충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월나라 문제에 대한 토론 중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할 것을 명했다. 비분한 오자서는 두 손으로 자기의 두 눈을 파낸 다음, 부하에게 명하여 그가 죽은 후에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성을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도록 그것을 성문밖에 걸어두라고 말했다. 이에 크게 노한 부차는 그를 잔인하게 찢어 가죽 주머니에 싸서 바다에 버리도록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백비가 정사를 맡음으로써 오나라는 패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주(周) 경왕(敬王) 38년 가을, 오왕 부차는 제후들의 패자를 결정짓는 황지(黃池)의 회맹에 참가하기 위하여 직접 오나라의 정예병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떠났다. 이에 오나라의 도성은 텅비게 되었으며, 구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나라의 도성을 공격해 들어가 오나라 태자를 고소대(姑蘇臺)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4년 후 오나라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반격할 틈도 없었다. 주(周) 원왕(元王) 2년, 월왕 구천은 수군을 동원하여 오나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2년여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오나라 성은 무너지고 부차는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가 자결하였다. 그후 서시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설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오나라가 멸망되는 날 범려는 고소대(姑蘇臺) 아래에서 옛날의 애인 서시를 찾아 황급히 태호(太湖)로 도망가서 그녀와 함께 일엽편주를 타고 아득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범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이름을 숨긴 채 오호(五湖)를 유랑하면서 세상사를 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산동(山東)에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부(巨富)가 나타났는데, 그의 아내는 꽃처럼 아름다웠으며 부부의 금슬도 아주 좋았다. 이 도주공이 바로 범려이고 그의 아내는 월나라의 미인 서시였던 것이다.

서시를 일컫는 묘사
日暮途遠 (일모도원) :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말로, 할 일은 많은데시간이 없음을 뜻한다
唐突西施 (당돌서시) : 당돌한 서시라는 뜻으로,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라는 뜻
동서효빈 :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어 창피한 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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