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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기 중국의 4대 미인 양귀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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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태백 작성일 2008-01-30 11:20 댓글 0건 조회 2,7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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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楊貴妃)

양귀비는 당(唐)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총애를 받았던 비로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 도호(道號)가 태진(太眞)이다. 포주(蒲州) 영락(永樂: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楊立)의 집에서 자랐다. 가무(歌舞)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도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 양귀비는 중국의 대시인 이백(李白)과 백거이(白居易) 등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정도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민간 희곡 속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그녀의 명성은 가히 세계적이어서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와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궁에 들어온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사람은 깊은 밤도 오해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하여 일찌기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섹스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으로부터 섹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여, 수왕(壽王)에게서 기초를 닦고, 현종을 만남으로써 기교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太眞宮)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천보 10 년 (751) 칠월 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 하늘에서는 비익조 (比翼鳥) 가 되고 , 땅에서는 연리지 (連理枝) 가 될지이다 . 이 뜻을 풀이하면 , ' 비익조 ' 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 ' 연리지 '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 현종과 양귀비는 이 ' 비익조 ' 와 ' 연리지 ' 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
하지만,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어느날 현종은 괵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 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그래서 현종이 또다시 양귀비에게 괵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高力士)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楊氏)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永樂)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그 뒤 다시 선우중통(鮮于仲通)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괵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다. 따라서 괵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다.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華淸池)로 보냈다.
화청지의 물속에서 반쯤 드러난 양귀비의 아름다운 육체를 본 67세의 현종은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26세의 양귀비를 품에 안음으로써 그간의 번뇌를 단번에 씻을 수 있었다. 다음 장에 실려 있는 양귀비의 입욕 조각상을 보면 바로 이때의 양귀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姚崇)과 송폭(宋爆)의 보좌로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天寶大亂)'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營州) 유역(柳域)의 호인(胡人)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747)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興慶宮)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심지어 목욕이 끝난 다음에는 오색천으로 요람을 만들어 안록산을 어린애처럼 굴게 하고 그를 요람에 눕히기도 하였다. 수십명의 궁녀가 요람을 흔들어 양귀비 앞에 올 때 마다 안록산은 그녀를 "엄마" 하고 불렀다. 40대 후반의 아들을 둔 20대의 젊은 엄마, 그들은 아마도 변태적인 사랑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은 안록산이 양귀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신체 중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힘껏 비비자 뜻밖에 그녀의 젖가슴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 결국 현종에게 들통이 나지 않기 위해서는 붉은 비단 천으로 가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중국어로는 "허즈 또는 "뚜떠우"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브래지어의 시초'라고 한다. 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어양(魚陽)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깨뜨려 버렸다. 구중궁궐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 수천만의 수레는 서남으로 피난갔다. (백거이의 <장한가 > 중에서)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리 남짓,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꽃 비녀 떨어져도 집는 사람 하나 없고,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주지 못하고,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저녁이면 날아드는 반딧불에 그리움은 더해지고,외로운 등잔불을 돋우느라 잠 못이루네.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 반짝이는 은하수에 동이 트려 하는구나 .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 차가운 비취 이불 뉘와 함께 같이할까 ? 아득히 사별하여 해가 다시 지나가도 , 영혼은 꿈속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네

그리고는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라."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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