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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 故鄕에 돌아와도 텃세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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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오락 작성일 2020-01-04 02:08 댓글 0건 조회 5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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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에 돌아와도 텃세는 여전하다.

  나는 직업상 삶의 자리를 많이 옮겨 살았다. 강원도 정선 토박이인 내가 시작은 속초시에서, 두번째 서울 중구 정동, 충남 논산, 경북 영덕, 경기 평택, 서울 영등포, 구로에서 살았다. 물론 아내는 서울 사람이지만 여기저기 전라도 빼고 임지를 옮겨 다녔다. 그러기에 아내는 조선 8도의 버전(version)을 다 알아차리고 흉내를 낸다.

 이번에 제주 여행 중 김영갑 캘러리에 들여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라는 제목의 사진과 글을 실은 그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 봤다. 선생은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20여년 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1985년도에는 아예 제주 섬에 정착하여 사진을 찍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고구마나 당근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는 한때 빈 들판에서 사진을 찍다 정체불명의 간첩 누명을 쓰고 파출소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제주사람들이 육지(뭍)에서온 것들, 섬사람(토박이)들과 분류하여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했다. 몇 번의 사진 전시회도 열었지만 여전히 뭍에서 온 사람으로 칭한다고 하였다.

나 역시 베이부머 시대에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유학과 결혼생활 직장생활을 옮겨 다니다 최종적으로 서울에서 20년 세월을 보내고 귀향 했다. 물론 지금도 연고가 서울이 더 많아 자주 서울을 들락거린다. 아내가 토박이 서울사람이라 이라 언어, 풍습, 문화와 정서의 흐름이 여기 사람과는 좀 다르다. 아내가 하는 말 “우리남편은 여기 정선 사람이 에요” 하면 그래요, 하면서 안색이 확 달라지는 는 정선 사람들이 란다  왜, 이토록 폐쇄적이며 신토불이인가 ? 이 글로벌한 시대에 ....

좁은 산속에서 살아온 강원도의 전통적 암하노블(巖下老佛-지하철 4호선)의 관념을 깨고, 산울로 둘러 쌓인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오”라고 한(恨)을 노래 하지만, 이제는 고개를 넘어 서울로 세계로 뻗어 갈 마음의 도량을 넓혀 나가야 되지 않을까?

물론 어느정도 지역 정서는 애교로 넘어가지만 무턱대고 끝까지 우겨대는 우격다짐 정서는 속히 버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귀향 5년차 된 농부로서 뼈 속 깊이 부친의 DNA가 흐르고 있지만 아직 외모와 라이프 스타일이 “여기 정선 사람이 아니지요” ? 라고 묻는다. 이러한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야 더 높이 더 넓게 상호 발전 할 수 있다.

내 자녀들을 향해서는 조기에 영어교육을 시키고 세계로 비상(飛上)하기를 그토록 바라면서 집에서는 표준 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서울 변두리 촌놈으로 살다 적응하지 못하여 출세가도 중도에 좌천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미국 작가 얼 쇼리스(Earl Shomis)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 가난하게 살까요”? 그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잘사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 문이죠”라고 했다 그럼 당신이 이야기하는 정신적 삶이란게 무었지죠? 그는 문화, 예술의 빈곤이 가난의 정신적 삶의 결핍으로 꼽았다.

그토록 자녀들이 육지로 시집가고 섬을 벗어나기를  소원하는 제주 부모님들이나, 그토록 곤두레 산나물 밥 먹던 정선 사람들이 아리랑 고개를 넘기를 소원하면서도 왜 넘겨줄 사람만 기다리는가? 내 인생은 내가 운명의 운전대를 잡고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명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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