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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기 똬리 (또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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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황소 작성일 2006-06-23 16:56 댓글 0건 조회 1,0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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똬리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뿌리고 뉘엿뉘엿 물이 올라 연두색 고은 빛깔이 산하를 뒤덮고, 수양버들 머리 풀고 달려오는 새봄이 오면 항상 ‘그리운 어머니’ 떠오른다. 문득문득 어머니가 이제 계시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자명종만 울리고 있을 때, 어둠이 깔려 집에 돌아와도 침침하기만 한 거실을 바라볼 때, 방에 불을 켜두고 잠이 들어도 여전히 꺼지지 않은 형광등을 보며 잠이 깰 때, 자주 찾던 동네 아주머니들을 길에서 마주칠 때, 가신지 벌써 6년이 되어도 문득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만난다.

  나는 몸살에 걸렸다. 집에 들어와 고개만 꾸벅거리고는 곧장 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누워버렸다. 젊은 나이에도 몸살쯤에 끙끙거리며 누워있는 나를 질책하고 있던 내 어두운 방문을 여신 건 당신, 어머니셨다. 당신이 8남매를 기르고 그리도 아프셨으면서 그저 하루 이틀이면 나아질 내 이마를 말없이 쓰다듬어주시던 어머니. 잠든 척 그저 어머니의 손을 받기만 하고 있던 난 그날 밤새도록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눈물마저도 이젠 보여드릴 수 없을 나의 어머니.

  어머니가 악성 치매에 걸리셨던 걸 한참 후에나 알았다. 그저 이번엔 평소보다 조금 더 그러는 것 뿐 이라며 친구들과 들녘을 쏘다니기만을 좋아했던 나. 언젠가 병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설의 고향을 보면서 “이제 엄마도 저렇게 가게 되겠구나”하시던 말씀만으로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난 마지막까지도 어머니에겐 그저 응석받이 어린애일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마음이 한껏 답답해 질 때가 있다. 어머니의 대답이 듣고 싶어서 지갑속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가 있다. 뒤를 따라 시장에 갈 때면 “좀 펴고 다녀라”시며 등을 치시던 어머니의 손에 다시 맞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조금씩 어머니와 함께 있던 기억들에서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시나브로 눈물 삼키는 그런 일들이 잦아들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된다.

  우리 가족의 8남매를 길러준 어머니에게서 가장 생각나는 것은 “똬리 짐을 일때 머리 위에 얹어서 짐을 괴는 고리 모양의 물건. 지방에 따라 또아리·또바리·또개미·또가리 등의 이름으로 쓰임.
”이다. 당신 남편의 변변치 못한 농사로 집안이 힘들고 가사가 기울자 어머니가 선택하신 것이 바로 똬리이다. 똬리에는 어머니의 땀내음과 체취가 그대로 스며있고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한(恨)이 빼곡히 배어 있다. 똬리에는 어머니의 애잔함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지금도 집안 거실에 한 자리를 잡고 있는 똬리를 보면 어머니의 단상(斷想)이 오버랩 된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한 지붕아래 오순도순 8남매가 사는 우리 집안은 가사가 그렇게 녹록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논농사도 많이 지었지만, 어머니는 봄마다 농사 짓을 수 있는 텃밭을 얻어 옥수수를 심고 여름이면 노랗게 물든 옥수수를 가마에 쪄 시장에 내다 팔곤 하셨다. 여름 어느 날이었다. 펄펄 찌는 더위 속에 어머니는 잘 삶아진 옥수수만을 골라 광주리에 가득 담고 계셨다. 이윽고 누님들의 도움아래 똬리를 머리에 얹고 무거운 광주리를 힘들게 이고 시장에 가셨다. 특히, 머리에는 광주리를 인 채, 양 손에는 더 팔기 위해 옥수수를 봉지에까지 담아 들고 가셨다. 나는 여름방학이라 어머니를 따라 소풍가는 마음으로 길을 동행하였다. 시장은 너무 긴 길이었다. 사천에서 주문진 시장까지는 10리가 넘는 고행이었다. 어머니는 힘든 내색않고 시장에 도착하시자 한 모퉁이를 틀고 하루 내내 웃음을 건네며 옥수수를 팔고 계셨다. 맨땅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똬리를 깔고 앉으라며 주신다. 똬리는 짚과 왕골 순으로 만들어 그런지 푹신푹신한 느낌이 와 닿았다. 옥수수 파는 시간이 오래 걸리자 무료함을 느낀 나를 달래기도 하였고, 사탕과 과자를 듬뿍 안겨주기도 하였다. 서녘에 지친 해가 작별을 고할 때, 옥수수 파는 일이 마무리되자 시장에서 국거리 장을 보시고 광주리에 담는 일이 일단락되었다. 내가 똬리를 어머니 머리에 얹자 광주리를 이고 쉼 없이 '내일 팔 옥수수를 다듬어야 한다'는 말로 집으로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거리는 밤 무렵 집에 도착하여 간단한 요기로 저녁을 대신하고 또 옥수수 다듬는 일에 매달리신다. "동제야! 동제야!" 어머니 깨우시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아침 해는 벌써 지천에 떴고, 옥수수를 찌는 일도 끝나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머리에 또 똬리를 얹고 광주리를 이고 계신 어머니가 "동제야, 오늘도 같이 가자구나." 어머니는 눈에 의문부호를 담고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어제의 힘든 기억을 떠 올리며 머리를 내 저었다.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고는 "잘 갔다 오마"며, 말을 건네고 동구밖을 걸어 나서는 순간 뒤틀어진 똬리가 갑자기 떨어져 뜨거운 광주리가 정수리에 맞닿아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셨다. 누이들이 뛰쳐나가 젖은 수건으로 어머니 머리를 적셔 주고 얼마동안 안정을 되찾자 떨어진 똬리를 다시금 얹고 광주리를 이은 채 바닷가 해수욕장으로 떠나가시는 어머니. 한 여름철 작열하는 태양에 데워진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며 피서객들과 서울사람들에게 옥수수 파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못내 저미어 오고 진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렇게 여름철 내내 똬리를 얹고 옥수수 파는 일이 끝나면 어머니는 시름에 겨워 몸 져 누우셨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공존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장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 어머니는 누워 계셨고, 마당에 있던 똬리를 매만지며 누나에게 물었다. 큰 누나의 얘기는 어머니가 그렇게 옥수수를 여름철 내내 팔러 다니신 건 20여년이 족히 된다는 것이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세월동안 똬리와 광주리는 나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이 된 셈이다. 아니, 어머니는 아예 주무실 때마다 머리맡에 똬리를 놓고 잠을 청하기에 똬리가 어머니의 분신인 셈이다. 소작농으로만 8남매 키우기기 버거웠기에 어머니는 여름철 옥수수 파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소작농으로 8남매의 식솔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의 몸뚱이뿐이었다. 하나 더 있다면 똬리와 광주리일 것이다. 연곡에서 이곳 사천으로 이사와 객지의 지리조차 채 익히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돈이 될 만하다 싶으면 무엇이건 떼어 새벽시장에 내다 팔았다. 여름 내내 옥수수도 말이다. 당신 몸집의 배쯤은 되어 보이는 무거운 짐들도 똬리를 얹고 이어 뒤뚱거리며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후, 입원한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던 나는 무심코 당신의 머리를 매만지다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삼단 같던 머릿결은 이제 온갖 풍상으로 하얗게 내려앉았는데, 그 듬성듬성한 정수리 부분에는 딱히 똬리 크기만 한 함몰자국이 너무도 뚜렷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고 하염없는 눈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었다.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머리 흔들리는 증세와 치매 그리고 각종질환으로 어머니의 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있음을 알고 나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가 자랄 때 너무 옹고집을 부려 걱정을 끼쳐 드린 것에 사과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말 훌륭한 어머니셨으며,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고집센 나머지 말하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들을 전하였다. 그리고 집에 어머니가 아끼고 있던 똬리는 내가 잘 보관하고 있노라고. 나는 편지에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그리고 인생의 완성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 후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씀하셨다. 어느날부터인가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셨다. 나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내가 찾아가면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종종 이렇게 되묻곤 하셨다. “그런데, 아저씨의 이름이 뭐요?” 나는 이름이 '동제'이며 자랑스런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으셨다. 아! 그 특별한 감촉의 손길을 다시 한번 만질 수만 있다면!... 어머니는 몇 년 후, 기어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악성치매로 한 많은 이 땅을 떠나신 것이다.

  항상, 봄빛 물결이 출렁일 때쯤이면, 정겨운 나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모든 사람들의 고향이고, 정신적 기둥이 바로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무명과 삼베 뒤에 숨겨진 비단이었고, 무대 뒤에 숨어서 생동하며 숨쉬는 여인이다. 지난 세월의 흔적 속으로 사라져도, 입력된 기억에서 아물거려도 '어머니'란 단어는 불혹의 언저리를 걷고 있는 내 기억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다.

  똬리는 나의 어머니를 대변하는 인격체이다. 그 똬리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영혼이 스며있고, 살아온 내력이 들어 있으며,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느새, 거실에서 똬리를 매만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똬리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세상이 변하게 마련이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그 시절, 기억속의 어머니가 떠오르고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이 더듬어진다.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 가서 찾아뵈시라. 생각처럼 오래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아들을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머니의 작품이고, 어머니의 DNA를 지고 태어났다. 바쁜 일상을 쪼개어 당신이라는 작품을 어머니에게 가끔씩 보여줄 의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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