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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 상해여행 1일차 <상해탐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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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회장 작성일 2009-04-26 10:25 댓글 0건 조회 1,1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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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슬슬 상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을 위하여 조선족 기사가 딸린 12인용 승합차량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2009년 4월 10일(금)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우리들은 먼저 조상들의 얼이 숨쉬고 있는 상해임시정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상해시내 일반 가정집과 같은 규모와 같은 환경속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우리의 선열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속에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을 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당시에 쓰던 집기며 가구들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장소 주변은 허술하여 이곳이 과연 우리 선열들이 이역만리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던 곳이라 생각하니 정부에서도 국민들의 정신 함양을 위하여서라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여 잘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입장료 수입등은 전액 상해시에서 갖고 가겠지만?)

상해임시정부청사에는 1인당 입장료 40위엔을 지불하고 입실하니 임시정부 활동내용등을 담은 비디오부터 상영해주었다. 비디오 시청 후 골목길 안쪽에 나있는 입구에서 비닐 덧신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이 걸려있고 집무실과 회의실, 주방, 임시정부요인들의 침실(숙소), 전시관 등이 있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윤봉길, 안창호, 박은식, 이동녕, 이봉창 등 사진을 보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아래층에는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으며 각층마다 당시 활동하던 모습을 간단하게 재현하여 꾸며놓았다.


중국공산당시발지 일대회지(一大會址)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의 제1차 전당대회가 열린 곳으로 중국 공산당이 여기서부터 최초로 출발한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원들에게는 일대회지(일대회지)가 불멸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당시 20대였던 마오쩌둥도 후난성(湖南省)대표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내부에는 당시의 긴박했던 회의 광경을 보여주는 미니어처를 비롯해 회의장등을 재현하고 있다.


신천지(新天地)

신천지는 상하이 다운타운에서 가장 먼저 도심재개발을 한 지역으로 고급카페, 부티크숍, 외국계열의 레스토랑 등이 모여있어 마치 유럽에 온듯한 착각이 드는 곳이다. 신천지의 저녁은 상하이 최고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술집, 샵 등을 찾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고 한다.

동타이루 골동품시장

동타이루 골동품 시장은 상해의 도시적인 모습과는 달리 고대 중국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오래된 물건을 전시 진열해 놓고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많았다. 옛날 도자기나 칼, 각종 불상, 악기, 동전(화폐), 전통의상 등등 각양각색의 고대 중국 전통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골동품하면 중국에서 없는 것 빼고는 다 전시 판매하는 곳이다.
오래된 도자기에는 청나라 황제들의 연호가 찍힌 거부터 짝퉁 공장에서 만들어온 모조품에 인공적인 녹처리가 된 것들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모택동의 초상화도 걸려있어 이것 저것 중국적인 것을 찾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원(豫園)

예원 주변은 상가밀집 단지로 관광객이 너무 많았다. 예원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은 강남지방의 날아오를 듯한 기와지붕, 아기자기한 정원, 그리고 100년전으로 돌아간듯한 거리풍경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중국식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 예원의 거리이다.

예원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구곡교(九曲橋)를 찾았다. 많은 관광객으로 예원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예원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로 아홉 번 꺾여있는 돌다리이다. 구곡교가 아홉 번 꺾인 이유는 당대의 세도가였던 예원의 주인 반씨 집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귀신(강시)이 되어 반씨 집안을 노렸는데, 귀신(강시)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꺽인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중국 귀신 강시는 앞으로만 깡충 깡충 뛸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구곡교 옆에는 유명한 남상만두점이 있는데 사람들로 항시 길게 줄을 지어 있어서 만두는 사먹을 수 없었다.

구곡교를 지나 입장료 40위엔을 지불하고 예원 관광에 나섰다.

예원은 명청시대 대표적 건물양식으로 당시의 세도가 반윤단이 아버지 반은(潘恩)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18년 공사끝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규모는 5만m2였다고 하는데 중국 정원의 모든 장점을 예원에 집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예원의 주인 반윤단이 죽은 뒤 급격히 기울어 한때는 성황(城隍)묘의 후원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19세기 아편전쟁때는 영국군이 침입하여 예원에 있던 값나가는 물건을 약탈해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후 근 100여년의 혼란기 동안 예원이 파괴되기도 하였는데 1956년 중국 정부에서 예원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지금의 2만 m2 규모로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예원은 삼수당, 앙산당, 대가산(大假山;기암괴석의 인공산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봄이면 만송이 꽆이 정원에 핀다는 만화루(万花樓), 양산당과 대가산 사이에 있는 인공호수 동쪽의 점입가경(漸入佳境:들어갈 수록 점점 재미있다는 뜻) 봄에 점을 찍는다는 점춘당(点春堂; 반은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100여명씩 거느리고 있었는데 점춘당에서 선을 직접보고 간택하였다고 한다.)
예원 한복판 연못가에 있는 놀이터 회경루(會景樓)와 내원(內園) 등등으로 이루어져 볼거리가 많았다.

예원 관광을 끝내고 매헌 윤봉길 의사를 찾아 홍구공원(루쉰공원)으로 향했다. 홍구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역사적인 장소다. 매원 안에 매정(梅亭)이라고 이름붙여놓은 작은 정자같은 건물이 있는데, 이건물 1층과 2층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꾸며놓았다. 기념관 입구에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있었고, 폭탄 투척당시의 기록들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폭탄투척당시 제조사용했던 물통모형폭탄과 도시락 모형 폭탄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숙연해 지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1세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 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22세에는 월친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가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후 1932년 4월 29일 이곳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들어갔다.

이윽고 군악이 울리고 열병식이 이어지고 행사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가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힘껏 던졌다. 이에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해일본 거류민 단장과 노무라 제독 등 수많은 일본군 장교를 죽이거나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 갖은 고문끝에 사형선고받고 일본육군형무소에서 사형집행후 쓰레기 처리장에 아무렇게나 매립되어 있었다. 이때가 25세, 짧지만 굵은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

다음은 윤봉길이 남긴 마지막 대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할 말이 없다. ”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워 폭탄투척 소식을 전해듣고 중국의 100만대군도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했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세계에 대한민국 독립운동이 요원의불길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행들 매헌 윤봉길 의사에게 묵념하고 중국 민족혼의 상징적 인물이며 문화혁명가이며 중국 최초의 근대작가인 노신기념관을 관람하고 상해에서 크기로 소문난 상해식 요리 전문점 소남국(小南國)에서 만찬 후 하루 일과를 여기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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