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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 효 행(孝行 ; 서열6번?)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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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 호락 작성일 2009-10-16 19:32 댓글 0건 조회 8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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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효행(孝行 ;  서열6번?)  --  29

<뉴스1>  한 대학생 아들이 꾸짖는 아버지를 둔기로 마구 때려 숨지게 하여 무려 넉달 동안이나 시신을 가족몰래 안방에 숨겨 두었다는 패륜 소식에 이어서,
 

<뉴스2>  박모씨(26세)라고 하는 또 다른 사람은 올해 8월29일 평소 알고 지내던 황모씨를 시켜 자신의 어머니(58)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을 데리고 있으니 돈을 보내면 풀어주겠다"고 협박, 100만원을 송금받는 등 지난달 14일까지 이 같은 수법으로 모두 9차례에 걸쳐 960만원을 뜯어 유흥비로 탕진했다고한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사채업자나 선박 선주 등을 가장하고 박씨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다"며 매번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돈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스3> 오래된 이야기로,
언젠가 우연히 접하게된 신문에서 본 내용중에 요즈음의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말에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서울 아들네 집에 올라가 한 일주일
지내다 보니 자신의 존재가 별반 대접받는 자리에 있지 못함을 느꼈다.

아들 집에서 가장 큰 소리하고 유세가 있는 1번 자리는 며느리였다.
손녀가 2번, 아들은 3번이었다. 그리고 강아지가 4번, 장인장모 5번

그리고 자기는 6번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골에 내려가서 살리라 마음 먹고
서울역에 와서 아들에게 전화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어쩌다가 0번이어야 할 우리 부모님들의 위치가 6번까지 밀려났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뉴스4> 얼마전 어느 이산가족 상봉중에 70세된 딸이 100세가된 어머니를 만나서 내가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 하다는 말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닫는다.

학교 다닐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중 정철의 시조가 생각난다.
 
  정철의 시조중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라는 구절이 생각 나는것은?

항상 괴롭고 아쉬울 때만 부모님을 찾는 요즈음 젊은세대 들의 가슴속에 
과연 자기 부모님은 몇 번으로 자리 매김 하고 있을까?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여기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제문 이있어 게재하니 참고하시길....

  亡母祭文 (망모제문) 
 
胎中十月之恩은 何以報也며 (태중시월지은은 하이보야며)
(태중 10개월의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膝下三年之養은 未能忘矣(숲하삼년지양은 미능망의)로소이다
(무릎 아래서의 3년의 양육은 능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萬世上에 更加萬歲(만세상에 편가만세)라도
子之心은 猶爲嫌焉(자지심은 유위혐언)이거니와
(만세에 다시 만세를 더할지라도 자식의 마음은 싫어할 리 없겠습니다만)

百年內 未滿百年(백년내 미만백년)하신
母之壽여 何其短也오(모지수여 하기단야오)
(백년인데 백년도 못 채우신 어머님의 목숨은 어찌 그리 짧으십니까)

簞瓢路上에 行乞一僧은 旣云已矣(단표노상에 행걸일승은 기운이의)거니와
(바리때로 행걸하는 승려는 어찌하겠습니까마는)

橫釵閨中에 未婚小妹는 寧不哀哉(횡채규중에 미혼소매는 영불애재)아
(비녀지른 규중의 시집 못간 누이는 어찌 애닯지 않겠습니까)

上壇了하고 下壇罷하고 僧尋各房(상단료하고 하단파하고 승심각방)하시고
(상단을 마치고 영단에 재를 파하고 스님들은 각기 제방으로 찾아갑니다만)

前山疊하고 後山重한데 魂歸何處오(전산첩하고 후산중한데 혼귀하처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중첩한데, 혼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嗚呼哀哉라! (오호애재라!)
(오호 슬프도다)



이 시는 조선시대 추앙받던 震默一玉스님(1562∼1633)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를 지낸 다음 읊은 시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진묵대사께서는 이조 중종 때 대도인으로 신통에 얽힌 일화가 많다.

스님으로 효심이 지극했던 예는 많지만 특히 이 시에 나타난 애끊는 모자의 정은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는지라 당시 억불치하에서도 대가집이나 유림들이 동문선에 써서 병풍을 만들어 방에 모셔두고 귀감을 삼았다고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

효성이 지극했던 진묵대사는 전북 김제 만경면에 어머니 친묘가 남아 있는데,
자식이 없어도 천년 동안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아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묘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았던 우리의 전통체계가
요즘은 점점 자취를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움에 이 글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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