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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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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돈길 작성일 2016-07-21 15:51 댓글 0건 조회 3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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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2016.7.13

몇년전 모 일간지에 덕혜옹주의 탄생 100주년 특별전을 경복궁에서 연다는 기사를 보고 적절한 시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차에 마침 일요일 오전에 집사람과 같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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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삶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임금의 딸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일본에 볼모로 가야하고, 아버지 고종이 서거하자 어머니(귀인 양씨,궁녀)와 생이별하고, 하기 싫은 결혼도 일본인 대마번주 소 타케유키와 하고,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부모도 없었다. 하나 뿐인 딸 마사에(정혜 正惠)도 자살하고 덕혜옹주는 이혼하고, 38년만에 귀국하니 이미 몸은 쇠약하여 병원신세를 지고, 마지막에는 의식불명상태에서 사람도 못 알아보는 상태였다. 1989년(78세)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념의 아낙네들보다 더 기구하고 한많은 일생을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덕혜옹주에 대해 어찌 필설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

 

덕혜옹주는 고종의 6남1녀중 외동딸이였다.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덕혜옹주가 얼마나 귀여웠으면 왕실의 법도를 어기며 왕의 처소에서 재웠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 유치원은 흔치않았고 덕수궁 안 즉조당에 7∼8명의 유치원생중 1명이 덕혜옹주였다. 아버지 고종은 즉조당을 찿아가 옹주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는것이 큰 낙이였다.

덕혜옹주의 묘(墓)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홍유릉을 탐방했다. 홍유릉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릉(陵)이고 여기서 약 700m 거리에 “대한민국 덕혜옹주지묘”라고 새긴 석비가 있었다. 덕혜옹주의 묘는 신의 숲으로 불릴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죽어 넋이나마 아버지 곁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숙연해 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본 대마도의 덕혜옹주 결혼비를 탐방하기 위해 새벽 KTX에 올랐다. 오랜만의 열차여행이라 급히 달리는 열차, 창 밖으로 보이는 시골풍경, 간간히 보이는 차량행렬과 공장들을 보면서 느낌은 먹지도 못하는 풀 뿌리로 배를 채우려는 방글라테시 어린이들, 모국을 등지고 정처없이 떠나는 시리아 난민들, 6.25의 잿더미 속에서 이 정도로 살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것 아닌가 자문자답해 본다. 부산터미날에 도착하여 부산국제터미날로 10분 정도 도보로 이동하여 여객선을 탔다. 푸른 바다에 몸을 실고 대마도와 얽힌 백제, 고려, 조선의 임진왜란의 곡절,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일간의 굴곡을 시간, 공간, 인물을 반추하면서 대마도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했다.

 

우리에게 대마도는 일본의 수백의 섬 하나가 아니다. 고려말부터 쌀, 콩 등 조공을 받치던 관계였다. 조선초에는 남해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태종 이방원의 성격에 그냥 둘수는 없었다. 태종은 아들 세종대왕을 대동하고 정벌군 사령관 이종무 장군에게 명령하여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들을 물리친 대마도이다. 대마도에는 덕혜옹주기념비 외 조선통신사비, 한국전망대,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 기념비가 있다. 면암은 대원군의 섭정 10년 되던 해 1873년 “멍석위에 날선 도끼를 놓고 대원군에게 상소했다. 주청이 가납되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처 달라”는 사생결단이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고 조선 천지는 민비의 세상이 된다.

 

대마도의 백미 덕혜옹주의 결혼비 앞에 섰다. 어린 12살에 조국과 어머니 양씨와 생이별할 때를 생각하니 애잔한 덕혜옹주는 오로지 생불여사(生不如死. 사는 것이 죽은 것만 못하다.)였을 것이다. 결혼기념비는 화강암에 음각된 “李王家 結婚奉祝記念碑” 글귀를 읽고 또 읽어 또 보아도 먹먹해져 오는 가슴을 달랠길 없었다.

 

덕혜옹주와 소 타케유키 결혼에 대해 역사는 정략결혼의 희생이고 사랑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 타케유키의 시집 “해향(海鄕)” 의 일부분을 보면

“그리운 아내여,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해궁의 회랑에도 아내여 들리는가. 흘릴 듯한 시선으로 생긋 웃음지어 보이는 어린 아내여.

먼 바다 갈매기가 모여드는 섬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잊지 않을 거야 세상이 다할 때까지”

덕혜옹주는 소 타케유키를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타케유키도 한국측이 반감과 증오를 드러내도 결코 비판이나 비난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유추해 본다면 처음부터 고아끼리의 결혼이고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결혼이였다. 그러나 시의 내용을 보면 부부로서 생활하면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닌가 싶다.

다시 이즈하라항에서 부산항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은 덕혜옹주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마도 덕혜옹주는 “아버지 어머니 고국땅에 돌아 왔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미워요.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께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비운의 황녀” 대마도여 잘 있거라.

37기 최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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