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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 정원의도시 쑤저우(蘇州)--<상해탐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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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회장 작성일 2009-05-04 22:04 댓글 0건 조회 1,1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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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2일(일)

 정원의도시 쑤저우(蘇 州)

하늘에는 천당이있고 땅에는 소주와항주가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소주, 그 소주의 오랜역사와 전설이살아숨쉬는 문화속을찾아 우리일행들은 아침일찍 출발하였다.

 양자강삼각주평원에 자리잡고있으며,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80km떨어져있다. 소주는 일찍이 “동양의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있는 물의도시로서 시내를 우물정(井)자 형식으로 흐르는 수로는 주변가옥과 잘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기도한다.

 또한,중국강남의 대표적인 정원이있는도시(園林之都)로도 유명하며, 이밖에 비단이많은도시(絲網之府), 바다가가까워 살기좋은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한다.
 그래서 천하의 원림(園林)은 강남에있고, 그중 소주의정원이 가장대표적이다 라는말을 탄생시켰다고도한다.

 소주를찾아가는 도로사정은 7년전보다 많이좋아져있었다.
소주는 우리에겐 미녀서시(西施)와 오월동주(吳越同舟),와신상담(臥薪嘗膽),일모도원(日暮途遠)등 귀에익은 전설에얽힌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낸 고장으로도 유명하며,

 춘추전국시대에는 오(吳)나라수도로 오왕 합려의 무덤이있어(虎丘) 지금도 관광객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어장검(魚腸劒),막야검(莫耶劒)등명검에 얽힌전설과 오월동주,와신상담등 호구(虎丘)와 관련하여 얽힌 교훈적인이야기만 모아도 몇권의책(冊)이나올정도로 많은분량이될 것이다.

 소주여행은 관광지 하나하나에 얽혀있는 사연과전설, 그리고 당시의 역사를이해하면 그야말로 최고의감동과 추억을 간직하고 가기에 좋은곳이다.

 오늘날 쑤저우관료들의 3상(三商)정신도 널리소문나있어 벤치마킹대상으로 삼을만하다. 삼상정신이란, 공무원들의 친기업 서비스정신으로 친상(親商),안상(安商),부상(富商)정신을말한다.

 그것은 소주에투자하는 모든기업인들에게는 마음놓고 투자할수있도록 친절하게(親商),안심하게(安商),그리고 투자자가 많은이익창출이가능하게(富商)도와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소주공무원들은 외국기업이 경제특구에 투자유치신청을하면 모든 인허가사항과 시간을알려주는 “처리시간보장제”를도입 최장 5일이내에 인허가사무를 끝내준다고한다.

그결과 소주는 1994년 경제특구로지정한이래 세계 500대기업중60개를포함 우리나라 삼성반도체등 세계 2000여개의 다국적기업을 유치하였다고한다. 따라서 소주시민들은 일자리를얻어 소득이늘어났고 상권이발달하여 지금은 중국에서 가장잘사는도시로 탈바꿈했다고한다.

 중국4대정원중하나인 졸정원(拙政 園;쭈오찡위안)

 졸정원은 명나라 정덕제4년(1509년)에 건립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여행안내가이드에의하면, 졸정원은 명나라때 암행어사로있던 왕헌신(王 獻臣)이 많은뇌물을 받아챙기다가 관직에서물러나 그 뇌물받은돈으로 정원을만들었다는것인데, 우리나라뇌물수준은 그 규모와비교해보면 뇌물도 아닌 듯(?)한데,

 아무튼 졸정원이라고 지은이름은 스스로 형편없는 관리라고 자학해서 졸(拙졸렬할졸)정(政정사정)자를 사용해 이름을 지었다는설과, 자기(왕헌신)를 파직시킨 권세가들을  비꼬는말로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어리석은자가 정치를하고있다는뜻)에서 따왔다는설등이있다. 하지만, 속뜻은 자신을 축출시킨 무리들을 비아냥거리는 뜻이맞다는설(說)이 우세하다. 또하나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왕헌신이 비단장사로 돈을 많이벌어서 지엇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오는데, 판단은 각자의몫이다.

 왕헌신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있었는데, 그 아들은 아버지(왕헌신)가 모아놓은 많은 재산을보고 공부는하지 않고 주색잡기를 밥먹듯이 했다고한다.

 어느날 왕헌신이 소주중심가에있는 현묘관(玄妙觀)앞에서 점괘를 보았는데, 점쟁이가 뽑으라고 내어놓은 점괘중에서 왕헌신이 뽑은 것이 바로 졸(拙)자였다. 그 점쟁이는 왕헌신에게 해석해 주기를 이 글자는 “손(手)을흔들면 모두빠져나가게(出)된다”라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점쟁이는 왕헌신이 병 때문에 근심하여 온줄로 알고서 “손(手)을 흔들면 병이낮게된다”고이야기하려 한것이었다는데, 왕헌신은 본래 자기가 정성들여지은 졸정원이 자신이 죽은뒤에도 자손대대로 자기집안의 정원으로 남을수있는가를 물으러온것이었다.

 그런데 점쟁이가 “손(手)을흔들면 빠져(出)나간다(잃는다)”라고 해석을해주어 기대와는 반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그 후 오래지 않아 (졸정원은 16년간 심혈을 기울여 지은후 왕헌산이 3년 동안 기거하고 죽었다) 왕헌신이 죽게 되었다. 왕헌신이 죽고 나자 훈계하던 아버지가 없어진 외아들은 자기 세상을 만난 듯이 매일 도박과 음주를 일삼았다.

어느날 졸정원을 거닐고 있던 외아들은 졸정원이 작고 답답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 정원 밖 서편의 대지를 사들여 추가로 확장 공사를 했고, 새로 확장한 정원 호수 위에 큰 대청을 지은 후에야 만족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재물도 도박에는 당하지 못하는 법. 마침내 어느날 호화 도박판에서 유원(留園)의 아들과 내기 도박판으로 하룻밤만에 졸정원을 잃고 알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전설을 갖고 있는 졸정원은 동원, 중원, 서원, 주거건물로 나뉘는데, 주거건물은 현재 위안린 박물관 전시홀로 이용되고 있다.

동원은 밝고 명쾌하게 트여 있고, 평평한 산등성이와 먼 산, 소나무 숲과 초원, 대나무 마을과 굽이쳐 흐르는 물을 주로 하고 있다.

졸정원을 관광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호수와 정자 사이를 연결하는 수많은 다리들이다. 대부분의 다리들은 모양이 직선이거나 아치형인데 비해 졸정원의 다리들은 5~6번 정도 꺾여 있다. 꺾인 포인트는 각기 다른 감상 포인트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일행들 졸정원 감상 후 사자림(獅子林;스쯔린)으로 향했다.

사자림은 졸정원과 더불어 중국 강남의 대표적인 정원 중의 하나이다.
원나라때 고승인 천여선사가 스승인 중봉화상(中峰和常)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한다.       
천여선사는 스승이 젊은 시절 수행했던 천목산(天目山)의 사자암(獅子岩)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인공적인 돌산을 조성했다고 한다.

거친 중국의 산맥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 것은 태호석(太湖石)이라는 돌, 태호석이란 호수 속에 있는 석회암의 일종으로, 오랜 시간 물의 흐름 속에서 주름과 구멍이 많이 생긴 기묘한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이다.

스승을 위해 자연을 창조한 정성과 모든 자연을 인위적으로 꾸미려한 오만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일행들 그 규모와 예술성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전설 속에 이야기가 많은 호구로 향했다.


호구(虎丘 후추) - 호구산 풍경구

일행들 전설로 가득찬 호구 탑쪽을 향하여 가는 길은 그야말로 멋진 풍경의 연속이다. 멋진 분위기 연출 그 자체였다.
수향(水鄕) 소주의 도시 정경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송대 시인인 소동파(蘇東坡)는 태어나서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到蘇州而 不遊虎丘  乃是憾事)라는 말을 했을만큼 돌아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춘추전국시대 어장검(魚腸劒)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오왕 합려의 무덤을 쓴 원래의 산 이름은 해통산(海通山)이었는데, 오왕 합려가 죽게되자 그 아들 부차가 장례를 치른 뒤 3일째 되는 날 커다란 백호가 나타나 무덤 앞에 꿇어 앉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구(虎丘)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호구(虎丘)는 정상이 70~80여m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호구에서 주요 볼거리는 제일 높은 곳에 호구탑, 그리고 올라가는 입구에는 강감천(憨憨泉), 시검석(試劒石), 단양전, 천인석, 검지....등이 있는데 강감천은 양대(梁代)의 고승인 강감이 샘물을 얻으려고 맨 손으로 샘을 파는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을 내려주었다는데, 여기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사계절 마르지 않은 샘물은 수질이 좋아 눈먼 사람이 이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샘물은 말라 없고 모양만 남아 있다.

강감천 샘을 지나면 오른쪽에 시검석(試劒石)이 나타난다. 그 옛날 오왕 합려가 간장(干將)이 만든 보검을 시험했다는 바위로 큰 바위덩어리가 마치 칼로 자른것처럼 쩌억 갈라져 있는데 시검석에 대한 전설은 따로 기록하고자 한다.


천인석(千人石)

1,000여명의 스님이 둘러 앉아 설법을 했다는 천인석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일찍이 추사 김정희는 “봄바람 가는 곳에 꿈을 의탁하려 하네, 나를 싣고 천인석을 향해 갈 수 없는지” (歸帆欲託 春風夢 載向千人石上無)라는 시를 지었다.

천인석 앞에 있는 백련지라는 연못 한가운데 점두석(点頭石)이 당시의 설법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호구검지(虎丘劒池)라고 쓴 글씨가 눈에 띈다. 오왕 합려를 연못 아래에 장사지낼 때에 보검 삼천 자루를 함께 매장했기 때문에 오늘날 검지(劒池)라고 불리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수많은 협객들이 보검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월왕 구천과 진시황, 손권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보검을 찾지 못하고 실패하였다고 한다.

검지(劒池)는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있는 연못으로 가운데에서 샘이 솟아 올라 사철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벽면에는 크고 작은 글씨가 각인되어 있다.

다음은 소주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호구탑이다. 검지(劒池)를 지나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쌍정교(雙井橋)를 지나니 팔각형 모양의 7층 호구탑이 보인다.

호구탑은 북송 건륭 2년(961년)에 완공되었는데 지금은 약 4~5도 가량 기울어져 있어 동양의 피사탑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당송 시기에는 “강남의 명찰”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으나, 전란 속에 세월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호구탑은 대부분 청대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소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였으나 탑이 기울어 있어 출입 통제하고 있었다.

물길따라 전설따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호구탑을 둘러보고 항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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