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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이준경 정승같은 위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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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돈길 작성일 2016-11-14 01:45 댓글 2건 조회 3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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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경 정승같은 위인은 없는가?
                                                                                    2016. 11.13

고전의 매력은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교훈이다. 신채호 선생님도 “과거를 잊은 백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작금의 박근혜·최순실게이트를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기가 서글프고 부끄럽다. 벌써 20여일이 지났건만 캄캄한 터널에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신문이나 TV를 멀리하려 해도 새로운 뉴스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자기들 나라의 드라마보다 재미있다고 한다.

조선왕조 5백여년의 공간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속에서도 특출한 정승이 있었다. 정승들의 고언을 듣고 위기를 넘긴 임금들이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 하륜, 황희 정승, 맹사성, 유성룡, 이준경 인물이 떠오른다.

필자는 이들중에서 이준경 정승을 소개코져한다.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조선중기의 중종, 인종, 명종을 현명하게 보좌하여 국방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의 맛을 알면 영혼이나 양심을 팔아서도 권력을 갖고자 한다. 이방원이도 형제들을 죽이고, 수양대군도 자기의 조카를 죽이고 임금의 자리를 차지했다. 영조도 외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 정도전, 유자광과 달리 권력의 단물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지만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던 인물이 이준경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눈여겨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가문의 몰락,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목격한 아픔을 딛고 ‘출사’의 길을 선택한 이준경은 화합의 리더쉽으로 혼란의 시대를 이끌었다.

이극돈의 조카가 이세좌(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먹인다), 이세좌는 이준경의 친할아버지이다. 아버지 이수정, 숙부 이수원을 비롯하여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때가 이준경은 6세였다. 이런 불우한 환경에서 정몽주, 길재, 김숙자(김종직의 아버지),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정통학맥을 계승한다.

명종시절 당시 오랑케와 왜구들의 반란과 약탈을 곧바로 해결못할 만큼 당시의 국가와 국방, 지휘관과 군사의 기강은 엉망이었다. 이런 시기에 한 치의 망설임없이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다. 여진족과 왜구를 진압하였다. 당시 왜구를 소탕한 사건을 ‘을묘왜변’이라고 한다. 이준경은 문신이지만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명종은 왕비와 후궁들에게서 세자를 얻기 못했다. 임금은 위독하였다. 영의정 이준경은 왕비에게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교지를 받았다. 하성군이 조선왕조 14대임금인 선조이다. 선조 즉위의 1등 공신은 이준경이다. 그러나 공신에 대해 일축했다.

조광조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노수신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였다. 숙청이나 사화의 피바람없이 구시대의 잔재를 털어내기까지 필사적인 노력한 인물이 이준경이다. 즉 과거보다 더 중요한것은 앞으로의 미래였다. 지난 수십년간 조정의 분열을 겪은 이준경은 진심으로 화합의 정치를 원했다. 신진사림의 대표적 인물이 율곡 이이다. 이들은 과거사 정리가 미흡하다고 했으나 과거사를 완벽하게 주장했던 조광조의 예를 들면서 결국은 기묘사화로 인해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이준경은 이이를 보면서 화합과 타협을 주장하면서 혼자서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신진관리들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준경이 물러난 뒤 젊은 관료들 중심이 군자라 칭하고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대신들을 소인이라고 몰아 붙였다. 이준경은 이제 ‘붕당’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준경은 선조에게 드리는 마지막 유언의 4개중 마지막 하나는 ‘사사로운 붕당을 꺠뜨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 유언을 끝으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는 ‘사람은 죽을 때 선한 말을 하는데 이준경은 죽을 때 도리어 악하다.’고 악담을 하며 이준경의 관직과 작위를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유성룡이 반대했다. 율곡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하며 절대 붕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준경의 유언은 정확한 예언이 되었다. 동인의 김효원 서인의 심의겸의 붕당이 시작으로 그 DNA는 오늘날 까지 한국 정치사의 망국병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 17년 이이는 병을 얻어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송강 정철은 강릉에 있는 이이에게 문병을 갔다. 이이는 정철의 손을 잡고 ‘송강, 사람을 쓰는데 파당을 가리지 말게’ 그리고 이틀뒤 선조 17년 1월 16일 새벽 이이는 세상을 떠났다.

이준경은 청탁, 아첨, 뇌물이 일상이었던 혼란의 시대에 관료로 살아가며 평생 청빈했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그의 ‘호’는 ‘동고(東皐)였는데 그의 집이 마치 집이 아니라 창고처럼 보인다고 해서 ’동고(東庫, 동쪽창고)라고 불렀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청렴한 삶을 살았다.즉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의 인사청탁도 거절하고, 아들의 훙문관 후보로 올라오자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인재를 발탁하는 안목도 뛰어났다. 퇴계 이황을 선조의 스승으로 추천했고, 방진의 사윗감으로 ‘이순신’을 추천한것도 이준경이었다. 조선사의 혼란의 시기에 많은 비판도 있지만 관리로서 중용과 화합, 청렴과 강직을 잃지 않았던 삶은 ‘현명한 정승’의 모범이었다.

경의·중앙선 전철에 몸을 싣고 새벽에 비가 내린 탓인지 물안개 같은 한강의 경치, 늦 가을의 단풍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준경 정승의 청렴한 모습을 그리며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영리의 묘를 찿았다. 돌아오면서 이준경과 박근혜의 근본적 차이는 백성보다 개인, 화합보다 분열, 청빈보다 부패, 진실보다 허위, 책임보다 무책임, 눈과 귀는 닫고 열고, 선인보다 악인, 양심보다 앙심, 도덕보다 부도덕, 정치감각 있고 없고 이러한 종합병원이 박근혜의 빈곤철학이었다. 아직도 박근혜가 불쌍하다는 계층!

100만 시민의 규탄을 보면서 이 시대 이준경 정승같은 화합의 위인은 없는가?

                                           37회 최돈길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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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님의 댓글

바람소리 작성일

결론은 화합인데 논지는 극단 같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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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길님의 댓글

최돈길 작성일

바람소리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