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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기 당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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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7-02-27 14:30 댓글 0건 조회 7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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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애~앵~
에~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대 낮에
난 여섯 살 된 아들 녀석과 한가로이 목욕탕에 있었다.
1986년으로 기억된다.

“대충 밀고 빨리 나와요.”
“전쟁이 났대요. 전쟁이.......”

어떤 아주머니가 목욕탕 문을 열며
열심히 때를 벗기는 아낙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사태를 파악한 난 아들 녀석에게 재빨리 옷을 입힌 다음
내 옷을 입으려 했으나
계속되는 사이렌 소리에 손끝마저 떨려 내 옷을 입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바깥으로 간신히 나온 난 공포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더욱 크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마저 우왕좌왕 술렁이는 바람에
‘아~ 정말 전쟁이 났구나.’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난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단골 미용실에 뛰어 들어 갔다.

그러나
미용실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전쟁이 났다는데 뭐해요?”
“빨리 대피해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다급한 내 목소리에 단골 미용사는 여유롭게 대답을 했다.
“뭐 진짜겠어?”
“전쟁나려면 나라지 뭐.”
체념을 한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전화 좀 쓸게요?”
다급하게 전화를 걸은 곳은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였다.

“여보세요.”
떨리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받는 사람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하였다.

“죄송하지만 인사과에 이 종호씨 좀 부탁합니다.”
“이 종호씨 지금 은행 나가셨습니다.”
“그럼 들어오면 전쟁이 났으니까 우리 만나려는 장소에서 만나자고 꼭 전해주세요.”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내따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피해있으려면 아들 녀석이 눈에 잘 띄지 않게 검은 옷을 입혀야겠다는 생각과
배낭을 챙겨 비상식량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떨리는 마음과 떨리는 손으로
그저 아들 녀석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에 검은 옷을 갈아입힌 다음
배낭을 메고 동네 슈퍼에 들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슈퍼 주인은 손님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배낭을 열고 초콜릿과 빵, 음료수 그리고 캔디 등 닥치는 대로 넣기 시작하였다.

“아줌마~ 내가 살아있으면 갚을게요.”
그 와중에 꼭 갚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슈퍼 주인은 계산도 안하고 알았다는 대답만 했다.

철저한 준비는 끝마쳤으나 이제 어디로 대피해야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앞에 사는 반장님 댁에 들러
“우리 이제 어디로 대피하느냐?” 물었더니
은평구에 대피 장소가 어디라고 자세히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요란했던 사이렌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TV에선 속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북한의 한 장교가 비행기를 갖고 탈출했다는 속보가.......

비록 십 여분 넘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숨 막히는 시간들이었고
오로지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결국 속보가 방송되면서 나의 행동은 해프닝으로 끝마쳐야만 했다.

그 날 이후
나에게 별명 하나가 붙여졌다.
민방위 대책 본부장이라고........ㅋㅋ

어쩜 평소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며
모두 나를 향해 웃어댔지만
지금까지 난 사이렌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떨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대처를 했건만
이젠 모두 해프닝으로 되어 버린 나의 행동은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남편의 회사에서도
“이 종호씨! 당신 안사람이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던데.......ㅋㅋ”
그리고 슈퍼 주인은
“그 때 갖고 간 물건이 얼마였지?” 하며 물건 값을 요구했고
단골 미용사의 놀림으로
그 미용실에 난 열심히 드나들어야만 했다.

나도 그렇다하지만
목욕탕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 그 아주머니
“전쟁이 났으니 대충 밀고 나오라.” 는 말은 또 무엇인가?

“빨리 대피 하~라.”
이런 말이 더욱 어울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하여간 당황하면 나의 행동이 어떻게 돌변할지
그건 아직도 미지수이다. ㅎㅎ

(사실 조금 전 아파트 소독하러 왔다는 소리에 문을 열어 주다
비밀 번호도 모르는 자동키 문이 닫히는 바람에 당황하여
소독업체 아주머니 전화를 빌려 이사 간 주인에게 번호를 묻는 등하다
한참 만에 집에 들어오는 소동을 벌였다가 생각이 나서 몇 자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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