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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 가을비에 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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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006-11-01 16:13 댓글 0건 조회 29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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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굵은 가을비가 아직은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대지를 식히고 있습니다.
내 삶에서 쉰세 번 이나 찾아온 자연의 순환이 오늘따라 처음처럼 느껴 지는 것은 내가 그렇게
무심히 세월을 지나친 까닭일 테지요.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이하였던 가을의 어느 날을 유아기라는 핑계로 기억하지
못하며, 쉰두 번째 지난 가을 비 내리던 날도 나이 탓으로 돌리는 편리한 핑계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늙어가는 것이 아쉽고 더 많이 살아있기를 최고의 희망으로 꼽으며 오늘도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순간 순간, 찰나 찰나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삶은 결국은 삶 전체가 엉망이 되는 것은 삼척동자
도 아는 일인데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그 순간들과 찰나들의 묶음을 놓고 세월을 탓하고
내 이웃을 탓하고 내 운명을 탓합니다.
그리고는 가을비가 추적 거리는 오늘 같은 날 괜스레 한잔의 목마름을 채워줄 누군가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쉰세해 일만구천삼백사십오일

계산기를 통해 내 눈에 비쳐오는 숫자는 참으로 많은 시간 내가 살아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오랜 나의 삶이 어느 한 순간보다도 더 짧게 기억됩니다.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는 왜 살아있는 것일까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내년에도 내가 삶이라는 단어 속에 속해 있다면 역시 오늘 이 가을비를 어떤 핑계로든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술을 먹지 않았는데 가을비를 바라보는 나는 벌써 취했습니다.
죽음을 잊어버릴 만큼 나는 취해버렸습니다.
삶이라는 수레는 내가 아무리 취해도 나를 끌고 반대편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움직입니다.

아! 나는

비록 지난 삶은 취객으로 살았으나  죽음의 문에 다다르기 전 한 순간만 이라도 내가 틀림없이
죽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깨어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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