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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기 제가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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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7-04-06 16:30 댓글 0건 조회 7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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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심부름 중 제일 싫어했던 것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오는 심부름이었다.

“오빠가 가라.”
“싫다. 계집애야 네가 가라.”
서로 주전자를 내던지듯 밀쳐내고 몸만 빠져나가려고 갖은 잔꾀를 부렸다.
“오빠 내가 5학년 되면 그 때 심부름 다 할께.”
“시끄럽다. 계집애야 뭘 5학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냐?”
“지금 빨리 갖다 와라.”

오빠의 X고집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난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시장 통으로 향했다.
발길에 걷어채는 것은 모두 차 버리며 땅과의 한 판 씨름을 강행하였다.

주점을 기웃거리다보니 막걸리 한 사발에 청춘을 맡긴 사람들이 꽤나 많아 보였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다보니
어느 새 눈치 빠른 아주머니
“막걸리 사러 왔나? 주전자 얼른 이리 줘봐라.” 하며 내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아갔다.
주인아주머니가 인심 좋게 쏟아 부운 막걸리는 걸음을 걸을 때마다 출렁이며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 막걸리 한 주전자는 꽤나 무겁게 느껴져
어느 새 양손을 오가다가 두 손으로 받쳐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걷다보면 바닥에 흘리는 것이 아까워 나는 주전자의 주둥이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을 입에 넣어 보니 달짝지근한 것이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또 한 모금을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전자를 치켜들었다.
가던 걸음 멈춰 한 모금씩 마시는 막걸리 맛도 일품이었지만
한 모금 한 모금에 취하여 비춰지는 세상 또한 보기 좋았다.

또 가다가 멈춰 서서 한 모금 먹어 치우고 가끔 염려스러운 마음에
연실 주전자를 바닥에 놓고 뚜껑을 열어 보곤 하였다.

‘아직 표는 안 나는데........’
속으로 주절대며 집에까지 걸어오면서 먹어 치운 막걸리가 그 새 반이나 줄었다.

멀리서 엿장수의 엿가락 장단이 나의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만 그 무거운 땅 덩어리가 올라와
나에게 시비를 걸고 말았다.

일어나려고하면 또 올라와 한 대 치고.......
결국 난 거대한 땅 덩어리에 치어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은근히 막걸리 심부름을 즐기는 여유까지 생겼다.

한참 배고플 때 먹는 막걸리 맛이 진정 일품이라는 것을
일찍 알아버린 지금도 술꾼처럼 빈 속에 먹는 그 맛을 찾는 버릇이 있다.

아버지!
그 때 심부름 시키신 막걸리의 량이 왜 이렇게 갈수록 줄어 드냐고
의아해 하셨지요?

이제야 실토하는데........
“그 때 그 막걸리 제가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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