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마당

기별게시판

47기 사소한 배려의 향기 *이해인 수녀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미소 작성일 2006-08-12 13:50 댓글 0건 조회 735회

본문

P1190327-d.jpg

수녀님, 곳곳에서 일어난 물난리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여름이 물러서고, 어느새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저의 자그만 글방 문을 열면 빨강, 하양, 분홍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한들대며 "안녕? 가을이 왔어요." 하고 사랑의 인사를 건네는 것 같고, 제가 좋아하는 석류나무에선 잘 익은 붉은 열매가 가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겨우 2미터 될까 말까 한 석류나무를 저는 늘 눈여보고곤 했는데, 그토록 작은 나무에서 꽃이 피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올 봄에 제가 심은 과꽃도 언젠가는 예쁜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습니다. 열매가 우리에게 손짓하는 가을의 뜨락에 서면 우리 모두 겸손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겠지요.

방황하고 서성이던 마음은 제자리에 앉히고 싶고, 설익은 사랑은 익히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 가을 저도 제 사랑을 조금씩 익혀가고 싶습니다. 이기심의 그늘에 가려 떫고 신맛이 나던 것을 너그러움의 햇볕으로 단맛 들게 하고 싶습니다.

벌써 30여 년이나 수도원에 살았어도 모든 일에 관대하고 선선한 이타심보다는 옹졸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이기심을 더 많이 발견하고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아주 사소할 것일지라도 다른 이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늘 아름답습니다. 담화 시간을 끝내고 공동방에서 나오다 어느새 제 신발이 바로 신도록 돌려진 것을 보았을 때, 출장길에서 돌아온 빈방에 누군가 살짝 꽂아놓은 들꽃을 보았을 때, 빨아놓고 미처 거두지 못한 옷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침방에 놓인 것을 보았을 때의 그 고마움과 은은한 향기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이것저것 야박하게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고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몸에 밴 사람들이 많은 집에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 숨어서 묵묵히 향기를 풍기는 들꽃 같은 사람이 더욱 많아지면 이 세상도 그만큼 향기로워지겠지요? 가장 가까운 이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사소한 배려가 부족해서 생기는 서운함이나 쓸쓸함이 의외로 많은 듯합니다. '그래, 조금 더 나를 잊자. 조금 더 다른 이의 필요에 민감하게 깨어 있고, 구체적으로 배려하는 사랑을 배우자. 그 일이 나의 것이 되도록 꾸준히 연습을 하자.' 라고 마음의 수첩에 적어두니 가을 하늘이 더욱 맑고 푸르게 느껴집니다.

가별(가브리엘라) 수녀님, 누구에게나 변함없이 섬세하고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으시는 수녀님의 그 모습은 제게 늘 감동을 줍니다. 올해도 좋은 가을 맞으시고 수녀님 특유의 그 해맑은 미소로써 이웃에게 기쁨을 뿌리는 별 수녀님 되십시오.

이해인 산문집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中


Only Our Rivers Run Free / James La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