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마당

기별게시판

43기 신신명(信心銘)

페이지 정보

작성자 西天 작성일 2011-10-25 18:34 댓글 1건 조회 370회

본문


사람들의 마음은 늘 밖을 향해 줄달음질 칩니다.
밖을 배회하는 마음은 늘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편견과 선입관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고통의 밧줄을 만들고 그 밧줄에 스스로 옥죄어 무엇인가에 얽매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의 내면에는 진정한 자유의 침묵이 흐르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반조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밖을 향해 내 달리고 있습니다.

중국에 禪을 전한 달마대사의 法을 이은 승찬스님께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한편의 詩로 엮어
전하는 신심명을 잠시 재잘거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감상해 봅시다.


신심명(信心銘)

위대한 도(道)는 어렵지 않다.
좋고 싫음을 가리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이나 미움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료(明瞭)해서 숨길 것이 없다.
하지만 털끝만한 구별이라도 하게 되면
하늘과 땅은 한없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진리(眞理)를 보고픈 마음이 있으면
좋다거나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좋고 싫음의 갈등(葛藤)
이것이 마음의 병(病)이다.

사물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는 동안은
마음의 평안(平安)은 헛되이 어지러진다.
도(道)는 광대(廣大)한 허공처럼 완전하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그러나, 좋다든가 안 된다든가 택한 탓으로
참 모습을 못 볼 뿐이다.
뒤얽히는 바깥 일 속에도
안쪽의 공무(空無) 속에도 살아서는 안 된다.
평온하게 무엇을 구하지도 말고
위대한 일체성(一體性) 속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그릇된 사물의 인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적(靜寂)을 얻으려고 행동을 억눌러 보아도
바로 그 노력이 도리어 인간을 행동으로 채운다.
어느 쪽이든 한편의 극단(極端)이 있는 한
결코 일체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단 하나밖에 없는 이 도(道)에 살지 않는 한
행동하는 일도 정적(靜寂)을 얻으려는 일도
단정(斷定)하는 일도 부정(不定)하는 일도 이루지 못한다.

세상만사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세상만사의 공허(空虛)를 주장하면
역시 그 진실을 놓치게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만큼
진리에서 멀리 떨어진다.
말이나 생각을 그만 두는 게 좋다.
그러면 모를 일 무엇 하나 없다.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면 뜻을 찾아낸다.
그러나 겉모습만 좇으면 바탕을 잃는다.
내재하는 광명(光明)이 있을 때
겉모습과 공(空)을 모두 초월(超越)하는 것이 있다.
이 공허(空虛)한 세계에 나타나는 겉모습의 변화를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지한 탓이다.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의견(意見)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무르지 마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是非)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모든 보완(補完)관계는 절대의 하나에서 비롯됐다지만
그 하나에도 사로잡혀서는 아니 된다.
이 길 안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일에 해(害)입을 것은 없다.
세상사(世上事)에 방해(妨害) 받는 일 없으면
그것은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사물을 분간하는 힘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전의 마음은 이미 없다.

상념(想念)의 대상(對象)이 없어지면
생각하는 주체(主體)도 사라진다.
마음이 없어지면 대상도 사라지듯
사물이 대상인 것은 생각하는 주체 탓
마음이 마음인 것은 사물(事物) 탓이다.
이 양자(兩者)의 상대성(相對性)과
공(空)의 통일체(統一體)인 이 근본(根本) 실재(實在)를 이해하는 게 좋다.
이 공 속에서 주체(主體)와 객체(客體)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각자(各自)와 함께 전 세계를 포함한다.
만약 성기고 촘촘한 것에 대한 구별을 하지 않으면
편견(偏見)에도 의견(意見)에도 유혹(誘惑)되는 일은 없다.

위대한 도(道)에 사는 것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시야(視野)가 좁은 자는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수록 그 걸음걸이는 더디다.
그리고 집착은 멈출 곳을 모른다.
깨달음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엉뚱한 길이다.

사물을 대하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라.
그러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
사물의 자연과 자신의 자연에 따르는 게 좋다.
그러면 가로막히는 일 없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생각이 울타리 속에 있으면 진리는 숨는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둡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잡(煩雜)한 판단(判斷)은 성가심과 피로를 가져다 줄 뿐,
구별하고 차별(差別)하는 일에 무슨 득(得)이 있는 걸까?

안심(安心)도 불안(不安)도 망상(妄想) 탓이다.
광명(光明)과 함께 좋고 나쁨도 사라진다.
모든 시비(是非)는 무지(無知)한 해석(解釋)으로 일어난다.
꿈 같고 허공의 꽃 같은 것을
잡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얻음과 올바름, 그릇됨과 같은 생각들은
결국은 한 순간에 멈춰야만 한다.
한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멈춘다.
상념(想念)이 어떤 구별도 하지 않으면
만물(萬物)은 그 본래의 모습 그대로
단 하나의 정수(精髓)로 나타나게 된다.
이 정수(精髓)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이다.
모든 게 동등(同等)하게 보일 때
영원(永遠)의 자아(自我)에 다다른다.
그곳은 비교(比較)도 비유(比喩)도 불가능한
인과(因果)의 굴레가 벗겨진 곳이다.

정적(靜寂)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寂寞)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이원성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면
하나 자체도 머물 수 없다.
그런 궁극(窮極)의 땅에는
어떤 규칙이나 묘사(描寫)도 적합치 않다.
도(道)와 조화를 이루면 하나가 된 마음에서
이기심의 모든 노력은 그친다.
의심과 망설임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
단 한 차례의 가격(加擊)으로 멍에는 벗겨지고
모두 멈춤 없이 흐르고, 다시 기억하는 자(者)도 없다.
모든 것은 텅 빈 채 명료(明瞭)하고
마음의 힘을 쓰는 일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제 사고(思考)도 감정(感情)도 지식(知識)도 상상력도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 속에서 적막한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움직이는 모습도 고요한 모습도 모두 사라진다.

이와 같은 ‘진여(眞如)’의 세상에는
자기도 없고, 또 자기가 아닌 것도 없다.
이 실재(實在)와 바로 조화(調和)하기 위해서는
의심이 일어나면 그냥 ‘둘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좋다.
이 ‘불이(不二)’ 속에서 무엇 하나 분리(分離)되는 것도 없고
또 배제(排除)되는 것도 없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광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 진실로 돌아감을 이른다.
이 진리는 시공(時空)의 크고 작음을 초월한다.
그곳에서는 한 순간의 생각도 만년(萬年)의 영원(永遠)과 다를 바 없다.

여기도 공(空), 저기도 공(空)
하지만 무한한 우주(宇宙)가 늘 눈 앞에 있다.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음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정의는 사라지고 경계(境界)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존재(存在)와 비존재(非存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심이나 논쟁(論爭)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이 실재와 아무 연관도 없다.
하나가 모두인 세상을 걷고
식별(識別)하는 일 없이 뒤섞여 가라.
이런 깨달음 속에 사는 게
미완성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길이다.
이 ‘믿음’ 속에 사는 게 ‘불이(不二)’로 향하는 길이다.
‘불이(不二)’야 말로 ‘믿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道)는 언어(言語)를 초월한다.
그곳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아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365일님의 댓글

365일 작성일

  법사님의 글 속에는 항상 진리를 느끼며
공감하지 못하는 소생의 부족함을 항상 느낌니다.

날씨가 차 지는데 몸 조심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