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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기 애 태웠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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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6-09-22 19:27 댓글 0건 조회 8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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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조카의 생일이었습니다.

친정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조카의 면회를 가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면회 갔다 올 동안 된장국이 쉬겠지?”
남편에게 물으니
“그래 다시 끓여 놓고 가는 것이 낫겠다.”
남편은 저녁에 다시 먹을 것을 생각해 끓여 놓고 가라고 권하였습니다.

“짐이 무거우니 북부 역까지 데려다 주면 안 될까?”
남편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출근을 하려다 말고 저에게 선심을 썼습니다.
“알았어. 빨리 가자.”
남편은 저에게 역까지 태워다 준다며 빨리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는데에도
막상 외출 한 번 하려고 하면 할일이 왜 그리도 많은지........

“가만히 있어봐. 신발 좀 신고........”
남편은 출근길이 늦었다며 저를 더욱 재촉하기에
신발을 질질 끌며 정신없이 뛰어 나갔습니다.

의정부 북부 역에 도착하니
친정 부모님이 미리 기다리시는 모습이 눈앞에 들어 왔습니다.

“엄마! 여기야.”
손을 흔들며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전철이 들어오는 신호음에 부모님과 상봉하자마자
전철에 올랐습니다.

“뭘 그렇게 무겁게 장만했냐?”
“조금만 준비하지.”
부모님께선 마음은 뿌듯하시면서 저에게 미안하신지
넌지시 한 말씀 건네셨습니다.

부모님은 노약자석에 앉혀 드리고 혼자 일반석에 앉자마자
열차는 많은 사람을 태우고 급히 출발하였습니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구나.’
갖가지 차림새의 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빠졌습니다.


“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여러분께 갖고 나온 이 물건은 각 가정에서 여름내 쓰시던 물건을..........”
전철 안에서 물건을 팔려고 하는 상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바라보았더니
선풍기 커버를 보이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살까?’
‘뭘 돈 없애고.......... 그냥 집에 있는 것으로 재활용하지.’
혼자 생각에 살까 말까를 고민하다
제 머리에 갑자기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앗! 된장국.’

아침에 바쁘게 나오느라 된장국에 가스 불붙이고 ........
그 다음이 까마득하였습니다.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디쯤인가를 바라보았더니
전철을 탄지 이미 삼십분이나 지난지라
집하고 너무 멀리 떨어진 동대문 이였습니다.

급한 마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아침에 왜 된장국을 끓여 놓으라고 해서는........”
하며 전화 받은 남편에게 대뜸 애꿎은 화살을 돌렸습니다.

“내가 끓이라고 했냐?”
애타는 저의 심정을 외면한 채 남편마저도 책임 회피를 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집안을 잘 살피지 못하고 나온 제 잘못이 크지만
순간 된장국이 쉴까 싶어 다시 한번 끓여 놓으라는 남편의 말이
지금 이 순간엔 무척 야속하기만 했으니까요.

“어떻게 해?”
“지금 집으로 가 볼까?”
남편은 해결책을 물어 왔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저는 아무런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서로 집을 나와 있은 시간이 벌써 삼십분을 초과했는데
‘만약 불이 났다면 이미 많이 번졌을 텐데.......’
만의 하나 불이 나 있을 집안 현장이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아침에 강아지가 쫓아 나오겠다는 것을 억지로 소리를 지르며
간식 몇 개 던져 주고 나왔는데......
짧은 순간 방정맞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지 말고 관리실에 전화 좀 해봐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선의 방법은 관리실에 응급조치를 부탁할 수 밖에 없을 듯 했습니다.
다시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고....
남편 역시 회사에서 다시 되돌아 가기엔 거리상 시간상 이미 늦은 듯 했었지요.

“나 전화 번호 모르니까 당신이 좀 해봐.”
이 판국에 또 나 보고 전화 해보라하네요.

“아니 지금 전철 안에서 내가 하는 것 보다 당신이 114사에 문의해서.......”
갑자기 열 받아 소리를 지르며 설명을 하는 도중
“알았어. 알았다니까.” 하며
남편은 전화를 뚝 끊어 버렸습니다.

야속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 번에는 집하고 직장하고 이십 여분 거리에 있는
아들 녀석이 생각나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아들아! 바쁘냐?”
“엄마 왜요?”
“큰일 났다. 집에 가스 불을 켜 놓고 온 것 같구나.”
떨리는 목소리를 직감한 아들 녀석은
침착하게 저를 달래었습니다.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 한 삼십 분 넘었다.”
“엄마 일단 전화 끊으세요. 제가 갈게요.”

급한 대로 최선의 조치는 다 취해 놓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놀란 가슴을 문지르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관리실에 전화해서 일단 바깥의 가스 밸브를 잠그라고 했어.”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했는데 연락 없는 것 보니 괜찮은가봐.”
“당신 확실히 안 잠갔어?”
“내가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기억이 나면 왜 생난리를 치겠어?”
“알았어. 별일 없을 거야.”
그래도 마지막 말은 저를 안심하게 해주더라고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방정맞은 생각으로 애 태우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제 앞에 서서 저의 무릎을 툭툭 쳤습니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아내가 암에 걸려 집안 형편이 어렵다며 껌 한 개만 팔아 달라.” 고 합니다.
가방을 열어 천 원 한 장을 드리고 껌은 다시 돌려 드렸습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제 곁을 지나간 아저씨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행동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반응은 참으로 냉담하였습니다.

“아직도 일할 나이에 뭐 하는 짓이야.”
“저리로 안 가?”
“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주변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또 한 사람이
“껌 한 개만 팔아 주세요.” 하며 껌 바구니를 질질 끌고 들어 왔습니다.
내가 보기엔
‘저 사람이 더욱 불편하게 보이는데........’
하고 생각하며 다시 천 원을 건네었습니다.

주변의 사람은 냉담한데 저 혼자 돈을 건네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고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몇 천원의 껌 값이 아깝지도 않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도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제 자신의 형편이 그저 고맙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시간을 그곳에 쏟다 보니
아들 녀석에게서 전화가 들어 왔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엄마! 가스 불 잘 잠그고 나가셨는데요. 뭘”
녀석의 말에 안도의 숨을 쉬며
“고맙다. 그래 수고 했어.”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였습니다.

정말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얌전하게 잘 잠겨진 가스 밸브가
어쩌면 그렇게도 까마득히 기억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저 켜 놓고는 더 빨리 끓여 놓으려고 불 높이를 키운 생각 밖에는 ........

“벌써 치매 현상이 보이나.ㅋㅋ”

부모님이 아시면 같이 불안해 하실까봐
조용히 혼자서 애태웠던 시간을 마무리 하고
‘그제서 부모님이 잘 계신가?’
생각 되어 자리를 힐끔 쳐다보았습니다.

노약자 보호석에 앉으신 부모님은
행여 딸자식과 떨어져 길을 잃으실까봐
제 모습을 자주 확인하시느라 저를 쳐다보시다가 같이 눈이 마주치자
친정엄마는 짓궂게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애정 표현을 하시고는 이내 깔깔대시며 웃으셨습니다.

“에~고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이 약이지........“

열차는 안타까웠던 제 마음과 관계없이 목적지를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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