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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인간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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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돈길 작성일 2017-10-26 11:22 댓글 1건 조회 47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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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2017.10.26
 기억하고 싶지않은 역사 가고싶지 않은 현장 그러나 그 역사와 현장을 반드시 기억하고 가야만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518년의 조선왕조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런 역사는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이 양란 현장의 중심지가 오사카이다. 필자는 오사카행 비행기를 오르고 내리면서 시종일관 한 인간의 야망으로 후대는 영원히 가슴에 안고 살게 한 일본 시대의 풍운아․왜적의 괴수 바로 “토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豐臣秀吉, 1536~1598)”를 탐방했다.

 오사카 공항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릴듯 말듯 찌푸린 날씨였다. 바람이 서늘해지고 무성했던 잎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햇빛의 기세는 없이 생명이 시들어가는 포쇄의 계절이다. 공항에서 숙소가는 버스내에서 인간 괴수 히데요시가 과연 인간이 었든가. 히데요시가 괴수였다는 것은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 왔을 때 여러 장수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 있어도 코는 하나이니 너희는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머리 대신 바칠지어다.” 이리하여 왜군 한 놈이 코가 한 되씩을 소금으로 절여서 히데요시에게 보냈는데 코의 수량이 다 찬 뒤에야 사로잡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니, 적의 살육은 이 때문에 더 심하였다고 한다.(남원성에서 자행된 코베기는 확인된 것만도 1596건)『건양록』

 *사진 : 교토의 이총(비총)의 무덤 앞에서 (耳塚 귀,鼻塚 코)-1번사진

 필자는 조선의 원혼들 앞에서 마음속까지 저려오면서 당시 조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대받던 상놈이 양반으로 신분상승하면 군역 면제되고, 상놈이 다른 말로 하면 노비이다. 관청에서 일하면 관노비, 민가에서 일하면 사노비이다. 노비 1명당 가격은 조롱말 1마리와 같았다. 노비는 영원한 노비이고, 양반도 사고 팔고하여 가짜양반도 많았다. 이러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는 전라도 수군의 대부분 상놈이고 그 중에서도 백정이나 사노비 출신들이였다.

 또 왜놈은 조총이고 조선은 활이니 당할 수가 없었다. 왜군은 1592. 4.13일 부산포를 돌진하여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하였다. 싸움도 제대로 안하고 한양에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자기만 살겠다고 조정을 버린채 도망 길에 오른 선조의 몽진(蒙塵, 왕의 피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이여송 사령관은 경악 그 자체였다. “아니 조선은 무기가 없는가?” 조선 군사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죽창, 농기구, 몽둥이였다. 무기며 군복은 각자 알아서 준비하는 처지였다. 조선의 빈약한 군사들이 파수(경비)라도 잘 봐주었으면 했으나 조선군은 “도망군”이라 했다. 조선의 관군 수준이 짐작간다. “이러고도 우리가 오늘날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입니다.”(유성룡)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어린시절부터 문제아였다. 이름부터 ‘고자루(원숭이,小猿)’다. 어른이 되어 ‘대머리 쥐’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자 재혼한 양아버지의 심한 학대로 가출과 방랑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연명하기 위해 바늘장사도 했다. 어느날 당대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행차 앞에 드러누워 버렸다. “너무 살기가 어려우니 제발 죽여 달라”라는 그의 애원에 오다는 못생긴 ‘원숭이’를 변소지기로 데려갔다. 이것이 그의 출세가도의 시작이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오다의 뒤를 이어 난세의 해결사가 되었고 무로마치 시대를 끝내고 통일 일본의 위업을 달성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와 받지않은 차이는 천양지차다. 미국의 빌 클린톤 대통령은 어린 시절 계부로부터 상습적 폭행을 당했다. 어느날 계부는 어린 클린턴과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기도 했다. 그런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어린 빌에게 신뢰와 사랑을 아낌없이 쏟았다. 사랑은 빌을 긍정의 인간으로 자라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친 소련의 스탈린은 극심한 아동학대를 당했다. 주정뱅이 아버지는 어린 스탈린은 매일 매질하였다. 그 후유증으로 스탈린은 커서도 정신적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사랑이 없는 성장 환경은 그를 난폭한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어머니 사랑의 결과는 클린톤은 미국 44대 대통령과 스타린과 히데요시는 괴수로 만들고 말았다.

 
* 오사카 성:애첩 요도 도노와 애첩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자결지- 2번사진

 히데요시는 인간적으로도 매우 불쌍한 인간이였다. 그의 최후 모습은 53세까지 후계자가 없었다. 1598년 3월 히데요시는 그의 부인과 애첩, 애첩의 아들 히데요리와 산보인에서 꽃놀이 후 병석에 눕게 된다. 히데요시 는 자신이 걸어온 과정을 생각하니 인과응보의 이치를 깨닫고 히데요리의 앞날이 걱정이 되어 1598. 7월 들어 5봉행 및 5大老(이에야스 포함)에게 히데요리에게 충성한다는 혈판서약서(血判誓約書)를 받고 유언으로 히데요리가 훌륭히 잘 할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2개월만에 토미도미 이에야스는 천하통일을 이룬다. 히데요시의 애첩과 아들 히데요리는 자살한다. 그 비석 앞에 필자는 “왜 아버지는 조선에 양란을 일으켰는가. 아버지가 밉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사죄드립니다.”라고 해야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에 이르러 인생의 허무함을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런가
  세상만사 모두가 일장춘몽이로세”

 그는 이렇게 남기고 1598. 8.18(62세) 죽음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오사카 성을 돌아서니 보슬비가 내렸고 바닥은 빗물과 낙엽이 엉켜있었다. 필자는 낙엽을 밟으며 히데요시의 얼굴을 밟은것은 아닐까!
 
 유대인이 학살당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동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4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된다.
                                                              37기 최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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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필자의 학자다움에 우선하여 존경을 표한다네
눈요기 관광보다 사적지를 찾은 친구의 행보야말로 박수 받아 마땅하리
적장 이에야스와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히데요리의 실책으로 멸문을 자초한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며 인간적인 윤리관으로 전장(戰場)의 윤리를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으이
평범한 삶이 제일 행복한 삶이거니 자위하며 비에 젖은 오사카의 낙엽을 밟으며 사색에 잠긴 어느 노신사의
고뇌를 상상해 보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