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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기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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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의근 작성일 2011-06-25 19:30 댓글 0건 조회 3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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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송해(84세)와 6.25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 짧은 인사가 마지막일 줄은......

폭격·총격 뚫고 가까스로 피란 내려와 통신부대 입대…

내가 휴전 전보 첫 타전



나는 연백평야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에서 3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끼 많고 노래 부르기 좋아했던 나를

부모님은 1949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보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합창단원으로 평양의 모란봉 극장 무대에 섰다.

솔직히 그때 난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다.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



낮에는 쌕쌕이가 폭격을 퍼부었고,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이후에도 밤에는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인민군에게 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젊은 청년들은 이들을 피해 다녔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의 또래 30 여명이 함께 피란을 다녔다.


며칠씩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한동안 반복됐다.



◆ 구사일생으로 혈혈단신 월남


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다. 12월 7일쯤이었나.


쌕쌕이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는 또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대문에 서서 "엄마, 나 며칠 다녀올게"하고 외쳤다.


누이동생이 마루 끝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서서


"조심하라"고만 하셨다. 예닐곱번 그 짓(피란)을 했으니 어머니도 금방


돌아올 거라 믿었을 게다.짧은 당부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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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송해씨가 6·25 전쟁 발발 이후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송씨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선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거리엔 피란민들이 많았다. 피란민 무리에 중공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쌕쌕이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하얀 눈 위에


시체들이 가득했다. 벌써 이곳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은 경포(輕砲)를


다리에 설치해놓고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에 맞거나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도 다리에서 떨어졌지만 철근 더미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았다.


보름 만에 해주항에 도착했을 땐 우리 일행 30 여명 중 6 ~ 7 명만 남아 있었다.


해주항에는 작은 배 하나가 있었다. 우리를 포함한 피란민 30 여명이 서둘러


배를 타고 연평도까지 갔고, 거기에서 연합군의 LST (상륙함)를 탈 수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 3,000 여명이 그물을 타고 배에 올랐다. 피란민들이


셔츠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통을 매단 후 바닷물을 길어올려 밥을 지었다.


배 위에 올라서서 까만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 복희를 바다 해 (海)로


바꿨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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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학교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뒤 육군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수신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모스부호를 쳤다. 들어온 암호 머리에 'ㅂ'자가 붙어 있으면


'보통전보', 'ㄱ'자가 붙어 있으면 '긴급 전보'란 뜻이었다.



새벽에 졸다가 '오보'를 내면 불려가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다.


가족들이 면회 오는 동기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들의 부모 형제가 가져다준 누룽지를 얻어먹으며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


전쟁 종식 사실을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은 내 최고의 자랑거리다.


1953년 7 월 날아온 암호 머리에 'o'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보는 거라 뭐냐고 물었더니 '휴전 전보'라고 했다. 휴전 협정 사실을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이어 전언 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 종식을


알릴 수 있었다 3 년 8 개월 복무를 마치고 1955 년 제대하자마자


'창공 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전쟁을 겪으면서 나는 생에 대한 애착이 없어졌다. 피란 와서 군 생활을 하고,


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늘 앞날을 알 수 없는 떠돌이였다. 살면서 지금까지


3 년 이상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왜냐면 여기 이 생활은 임시 이니까,


지금이라도 할수만 있다면 어머니 기다리시는 고향 집으로 가서 살 것이니까,


그래도 울퉁불퉁한 자갈길 인생을 비틀거리면서도 주욱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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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땅을 밟다


환갑이 넘은 1988 년부터 '전국 노래 자랑'을 진행해온 나는

1998년 11월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됐다. 18037E0C4AC43DAF5BB03C


유람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 금강산 장전항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는 것은 금방 허락되지 않았다. 50 여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출발했는데, 조선일보 기자와 나는 입국이 거부됐다.


그들은 내가 왜 남아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북한 출신


반역자라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창밖으로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보며 혹시나


잡혀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흘 만에 금강산 관람이 허락됐다. 만물상 바위를


지나는데 안내원이 " 눈을 감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생각하세요. 눈을 뜨면


그분이 보일 겁니다 " 라고 했다. 10 초간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어머니 얼굴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날 허겁지겁 헤어진후 꿈에서조차 보지못했던 어머니얼굴이 거짓말처럼


그곳에있었다. 2003 년에는 평양 모란봉 공원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북쪽에선 전성희, 이쪽에선 내가 공동 사회로 하기로 결정이 됐다.


둘이 무대에 나가야 하는데 서로 얘기도 못하게 했다. 전성희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아바디(아버지), 나는 (고향이) 송화야요" 라고 속삭였다.


송화는 내 고향 재령에서 불과 30 리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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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3년 8월 11일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 무대에서 열린 ‘특별기획


평양 노래자랑’에서 송해씨가 한 북한 출연자와 함께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한에 두 번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우리 생에서 편안한 남북시대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간 그곳에서 절벽과 낭떠러지를 봤다.


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모든게 제약이었다. 이 모든 비극이 6·25전쟁이


남긴 것이다. 몇년 전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 계획으로 '이것이 6·25다'라는


극을 준비했었는데 정부에서 못하게 했다. 남북 해빙 무드인데 분위기를


흐리는 일이라며 못하게 했다. 이제 내 나이 여든이 넘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부모님 생각이 더 절실하다.


생사 여부를 몰라 그동안 제사도 못지냈는데 5년 전부터는 추석때


부모님 제사를 지낸다.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놈도


한쪽에 같이 올린다. 통일되면 고향인 북한 재령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꿈이다.


그날이 죽기 전에 오기는 할까.


요즘 가수 김양의 노래 '우지마라' 들으면 가사가


딱 내 얘기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정해진 운명이야 팔자라거니…."







★ Korean War, 6.25 한국전쟁 ★






아주 귀한 자료입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보는게 좋겠습니다.




Korean War 01( Trouble on the horizon )










Korean War 02 전쟁은 시작되고









Korean War 03 부산을 사수하라












Korean War 04 인천상륙작전









Korean War 05 가자 서울로









Korean War 06 38선을 넘어서









Korean War 07 중공군의 기습









Korean War 08 얼어붙은 장진호









Korean War 09 다시 남쪽으로









Korean War 10 야전병원의 활약









Korean War 11 전쟁의 균형을 잡아가며









Korean War 12 철의 삼각지대









Korean War 13 평화를 향해









Korean War 14 공습









Korean War 15 전쟁의 막은 내리고














美 워싱톤DC 한국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

Click!ar003.gif日本 足立 美術館 庭園



Click!ar003.gif한강변 코스모스풍경



Click!ar003.gif2010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美 워싱톤DC 한국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



복사 http://blog.naver.com/vietvetkorea/50004378405







미국에 살고있는 전우께서 미국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국전 기념공원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을 한국의 파월전우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예전에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가셔서 찍은 사진을

www.vietvet.co.kr (월남전과 한국) 운영자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한국전쟁 기념공원 사진을 찍으신 순서대로 편집하여 올립니다.

전우님 고맙습니다
.








방문객들을 위한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안내 팜플렛.







몰의 정방형 수로(Reflecting Pool)를 가운데 두고


월남전 메모리얼과 마주한 곳에 한국전 메모리얼이 있다.





미국인들의 애국심은 실로 대단하다.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거나 전사하는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는 전통이 있다.



국가차원에서 이런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고양시키려고


노력하는 나라는



그리 많치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메모리얼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다국적군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린듯한


판초우의를 입은 다소 피곤에 지친 군인들


동상이 대열을 이루며


어디론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들을 따라 같이 걸어가며 용감한 우리편이라는


생각에 잠길때


그들앞에는 성조기가 펄럭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Freedom is not Free" 벽면에 세겨진 이 선언적 문구는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면에




'너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우리가 희생된 결과이다'


라는 우회적 표현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관광객이 집중되는 상징적 공간에 그들의 의도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우리의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하여




분연히 나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전쟁 1950년~1953년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54, 246명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103, 28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아직도 8, 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의 손실은


전사자 415, 004명을 포함하여


총 1, 312, 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당시 대한민국이 입은 경제적 손실은



가히 계수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인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렇게 수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전쟁을 마감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궁핍했던 우리네 살림살이는


이제 가정마다 자가용 한 대 정도는 두고사는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었다.



대한민국의 이름 아래 누리는 이 안락한 삶은,



멀리는 반만년 동안 크고작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낸 참전용사들에게,


가까이는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유엔연합국 전몰장병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한국전쟁후 반세기가 지났어도 한반도는


총성만 멈춘 준 전시 상태로 남겨져있다.



그 반세기동안 남북한은 각각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진행되었고,


남북의 이념적 간극은 벌어질대로벌어져서고착화 되었다.


현재 북한은 반미와 남조선해방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고,



전세계의 이목은 유일무이한 독재공산체제


김정일을 압박하고 있는



불안한 정세속에 한반도가있다.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방심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한국전쟁을 이해하고


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작금의 평택사태를 보노라면 붉은 세력들이


반미를 부르짖고 있고,



대한민국의 법과 정치환경은붉은 무리들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경험부족의 정치가들은 북한의 계략에 놀아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미동맹이 절실한 현실에 반미를 부르짖으며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으니,



제2의 6.25 전초전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잊으면


그 민족은 멸망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부상자: 미국 103, 284명 / 연합군 1, 064, 453명



포로: 미국 7, 140명 / 연합군 92, 970명



실종자: 미국 8, 177명 / 연합군 470, 267명



전사자: 미국 54, 246명 / 연합군 628, 833명







어느나라든 자기조국에 대한 애국심이야 다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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