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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기 시계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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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해군 작성일 2007-03-20 18:45 댓글 0건 조회 6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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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제게 시계를 선물한 두 사람에게는 우연히도 닮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남자라는 것.. 그리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그렇지만 한 사람은 이별의 선물로, 다른 한사람은 새로운 시작의
선물로 제게 시계를 선물했습니다.

두 명의 남자는 바로 아버지와 지금 제 옆에 있는 신랑입니다.
먼저 아버지께 받은 시계선물은 ...
83년도에 돌아가셨으니 25년전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지요.

이름 있는 시계도 아니었고, 따로 케이스도 따로 없었고, 그냥 당신 잠바 주머니에서
꺼내서 무덤덤하게 제게 건네주셨습니다. 리어카에서 볼 수 있는 비싸지 않은
시계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께 선물을 받아보기는 첨이었습니다. 항상 당신이 야간 근무할 때
나왔던 음료와 빵을 다 안 드시고 뒤춤에 감추고 오셔서 주시는 게 다 였지요.
어찌나 고맙던지. 사실 아버지가 졸업선물이라고 제게 말씀하고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졸업 즈음에 주셨으니 그러겠거니 하고 짐작하는 거지요.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멋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졸업선물이
아니라 이별선물이었던걸 알게되는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몸이 좀 안 좋으셨거든요. 속이 안 좋아서 집에는 약이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 품에 안기면 하얗고 끈적끈적한 약 기운이 먼저 느껴졌을
정도입니다.
손목에 차니까 손가락 두 마디정도는 더 들어갈 정도로 컸지만, 날아갈 듯
신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시계를 갖고 있었던 반 아이들은
별로 없었던 때입니다. 메탈계통에 동그란 디지털 시계였는데, 별스런 멋도
없었고 예쁜 아이들 캐릭터 시계도 아니었어요.

잘 때도 손목에 차고 자고, 동네 아이들을 일부러 집에 모아다가 자랑도
하고 했습니다. 친구가 시간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시계를 수시로 보며
시간을 알려주곤 했답니다. 워낙 커서 손목에 찰랑찰랑하는 시계 줄이
어찌나 시원하고 느낌이 좋던지..

중학교에 들어가 시계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처럼 제 손목에 꽉 차여져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저를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아파오셨던게 위암이라는 진단을 들은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고추잠자리가 정신없이 날리던 음력 6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시계는 아버지의 이별의 선물이었나 봅니다.

아버지를 시골 선산에 모셔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목에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제나이 아직 열네살이었어요.
효도한번 못하고, 뜨거운 밥상한번 제 손으로 못차려드렸던게 어찌나
후회되던지..

저는 이만큼 컸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젊은 그대로 계시겠죠!
하늘나라에서..

 
두 번째는 94년 겨울에 어떤 남자에게 받았습니다. 지금은 신랑이지만..
학비 때문에 중간중간 휴학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는데 다행히 그해 겨울
졸업을 바로 앞에 두고 관공서에 취직을 했습니다.
졸업을 늦게 한 탓에 여자 동료들은 나이가 2~3살 어렸고, 군에 갔다 온
남자동기들과는 엇비슷해서 친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때가 아마 회사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던중이었을겁니다.
몇몇 동료랑 함께 종로에 낙지전골 잘하는데 가 있다고 하여 저녁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 남자는 그중에 한명이었지요.
특별하지도 않은 외모에 그저 평범한 사람이어서 그다지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술을 얼마나 잘 마시던지..주량이 3병이라고, 5병까지는 끄덕 없다고 먹어대는게
어쩐지 불안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1시가 다 되어 끝난 술자리에서 각기 헤어져 택시를 잡는데
갑자기 푹~하고 쓰러지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한겨울 종로바닥에 뻗어버린
그 사람을 간신히 일으키는데.. 술 취한 사람 무거운 거 처음 알았습니다.
뿌리치기는 왜 뿌리치는지.. 팔을 잡아 일으키려는데 “홱”하고 밀치더군요.
아무튼 겨우 태워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제 왼쪽 손목에 채여 있던 팔찌가
없어진 겁니다. 아마  실랑이할 때 떨어진 모양입니다.
길거리 가다가 눈에 띄어 산건데, 잊어 버렸지만 그렇게 아깝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그 남자를 우연히 쉬는 시간에 만났을 때 “내 금팔찌(!) 찾아 놓으세요!”
하며 농담으로 던졌는데 미안하다고 연신 하더군요.
며칠 후 나를 넌지시 부르더니 곱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더군요. 뭐냐고
물었더니 시계라고 하더구요. 팔찌를 자기 때문에 잃어 버렸으니 자기가
하나 사주려고 하는데.. 팔찌보단 시계가 실용적인 것 같아 샀다는 겁니다.
이런건 부담스럽다고 다시 주니, 절대 부담 갖지 말라고 막 밀어 넣으며
주는 겁니다. 이게 그와 나와의 질기고 질긴 동아줄이 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걸 계기로 해서, 고마우니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해서 한번 만나고, 다음번엔
또 자기가 사겠다고 해서 또 만나고.. 이렇게 정들어서 3년의 사내연애를 거친 뒤
드디어 결혼에 골인해 올해 결혼 10년차가 되었습니다.

이 두개의 시계는 제가 아끼는 보물박스에 소중이 담겨져 있습니다. 잠이 안오는
날이면 가끔씩 열어보며 회상에 젖곤 합니다. 아버지께 받은 시계는 다섯개의
손가락이 다 안들어갈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세월이 지나 시계의
안쪽부분이 노랗게 녹이 슬었습니다만,  그 시절의 시리고 애틋한 추억은
점점 더 깊어만  가 앨범을 넘기며 빛바랜 사진속의 아버지 얼굴을 더듬어
내리니 가슴이 저려옵니다. (퍼왔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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