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마당

기별게시판

37기 노블레스 오블리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8-03-18 13:57 댓글 0건 조회 234회

본문

울고넘는 박달재 ㅡ
그 박달재를 넘으면 제천 시내로 들어가기 전 장담(長潭)마을에 자양서사(紫陽書舍)라는
소담한 서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바로 조선후기에 주리론(主理論)을 크게 일으
킨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의 학맥(學脈) 적통(嫡統)이 이어진 곳이다.
화서는 이기론(理氣論:정신과 물질론))중 이(理)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하고 그 도덕적
존엄성을 춘추대의(春秋大義)와 결부시켜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초석으로 한 위정척사론
(衛正斥邪論)의 사상적 기초를 일구웠다.
일제가 을미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선포하여 민족탄압을 시작하자 그의 도맥
(道脈)을 이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은 수백명의 유생들을 모으고 이 망국의 백척
간두에서 지성인들이 올바르게 처신해야 할 강령3조의 통문을 발한다.
이 뜻에 호응한자 3,000 이 넘었으며 곧바로 격문을 초하고 '제천의병'을 조직하여 일군과
대항하니 한말 지식인들의 추상같고도 돌올한 각오가 의연했다.

나라가 위기상황에 이르면 권력있고 돈많은 자들이 맨먼저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치기에
바쁠것이라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구 한말 위란의 대처를 살펴보면 당대의 양반들이나 권문세가의 지식인들이 결코
요즈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라고 부르는 '지식인의 도덕적 의무'를
외면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높은 권력을 휘두르고 고대광실에서 으리으리하게 떵떵거리며 살던 양반층들이
민족의 봉기를 주도하고 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슴을 바치는 솔선수범의 의행(義行)을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2464.jpg.
옛날 경주 교동에 10代 진사(進士)에 10代 만석(萬석)을 유지했다는 '최부자집'의 전설
보자. 이 가문에는 대대로 전승되는 가법(家法)이 있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절대로 해서는
않되고 재산은 만석이상 절대 늘리지 말라는 것이다.
진사란 향시만 급제하면 따라오는 실직(實職)없는 명예에 불과하다. 부침이 심한 권력과
결탁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그렇게 가법으로 묶어둔 것이다.
1만석 이상 늘리지 말라는 제한은 해마다 자연증식되는 잉여재산을 가산에 보태지 말고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다리를 놓거나 보를 막는 등 공익(共益)을 위해 소비하라는 것이다.
그 정신은 상생(相生)이요,적선(積善)이요,보시(普施)였다.
따라서 최부자는 권세에 오염됨이 없고 또 부자라 해서 이미지를 손상키는 커녕 오히려
우러름을 받았으니 이러한 철학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300년 동안이나 만석꾼으로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비단 최부자뿐 아니라 옛날 부자들 가운데는 고을의 사람들에게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여러 관행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마당쓸이'가 그것이다.
동네에서 양식 떨어진 사람이 있으면 이른 새벽에 부자집 앞마당을 쓸고 돌아간다.
물론 쓸어 달라고 원한 노동이 아니다. 그러면 부자집에서는 그집 식구가 보름이나 한달 먹
을 양식을 어떤 보상조건 없이 종에게 지워보내곤 했는데 이와같이 후덕한 부자를 '덕부(德
富)라 하여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img7.gif .
러시아의 농부 '파흠'이 바스카르 지방에 갔다.
1,000루불만 내고 해뜰때 출발해서 해지기 전에 돌아오면 원하는만큼 땅을 가질수 있는 곳
이였다. 다음날 파흠은 일찍암치 길을 떠났고 펼쳐진 비옥한 초원은 끝이 없었다.
'조금만''조금만' 하며 더 걷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놀란 그는 허겁지겁 죽을힘을 다
해 되돌아 걸어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기 직전 간신히 출발점에 닿았다. 촌장이 축하 했다.
"정말 좋은 땅을 갖게 되었군요"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땅을 파고 그를 묻었다. 파흠은 겨우 그가 누울 땅
만큼밖에 가질수 없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인간에게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 』의 줄거리임을 모두 안다.
이 얘기를 새삼 들먹이는 것은 근자에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소위 사회 상류지도층 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불감증의 심각성 때문이다.
매스컴에 대문짝 하게 나오는 인사들마다 모두가 어쩌면 그렇게 엄청난 땅부자들인지 ㅡ
그들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재산을 증식시킨 재테크의 비법이 바로 땅투기였다니 그동안
대한민국이 말로만 듣던 부동산투기의 천국이였음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놀러갔다가 친구가 권유해서 샀다'는 그 당당한 설명은 부동산개발사의 투기교본 제1조
에 실려있는건가 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정말 얼마의 땅이 필요할까?
일찍이 촉의 제갈량이 임종을 앞두고 후주(後主) 유선에게 올린 표에서 '신은 성도에 뽕나
무 800그루와 메마른 땅 열다섯 이량이 있어 가족의 생활은 충분합니다' 라고 천명 했다니
그 무사무욕(無私無慾)이 수십채의 빌딩과 수백만평의 땅을 소유하고도 한점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의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들어나게 한다.
어디 부동산 투기 뿐이겠는가.
병역기피,학력위조,금융사기,세금포탈,논문표절,사회폭력,부적절한 관계,국적포기....
꼽을수록 불법과 비리의 백과사전같은 이 현상은 영달보다는 도덕적 의무를 지키려는
옛 선인들의 귀한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하는 계기가 된다.

0000000000032317813_%B3%BB%B8%F0%BD%C0%285%29.JPG.

근자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워크가 전한 영국 '해리'왕자의 아프카니스탄 복무사실을
놓고 외신들의 논란이 뜨겁다.
왕위계승 서열 3위인 해리왕자가 위험이 극에 놓인 아프칸 최전선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한 영웅적인 행동이라고 치켜세우는 반면 반전무드쪽에서는 일종
의'선전전'에 불과하며 그의 영웅담에만 치중하고 파프칸전략의 실패는 가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탈레반이 3차례나 암살을 시도했을만큼 위험한 곳임을 알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생명을 맡긴 해리왕자의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이행은 찬사 받아야
마땅할 일이라 여겨진다.
대한민국에 전쟁이 터진다면 해외로 도피시킨 자신의 아들을 불러드릴 소위 지도층 인사
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