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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문학평론 감상/시인 이해인론,마르지 않는 신앙의 샘에서 물을 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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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bs 작성일 2006-09-17 15:41 댓글 0건 조회 3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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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신앙의 샘에서 물을 퍼내다 - 이해인론

시인, 문학평론가 : 손희락


1: 서론

시인 이해인은 1945년, 이 땅에 태어나 깊은 믿음과 신앙이 없이는 걷기 어려운 수녀가 되었다. 그가 수녀로써 예수의 부름을 받은 개인적 사건이 특별은총에 속한다면 1976년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내어 놓으며 문단에 데뷔한 사건은 또 다른 신의 일반 은총에 속하는 그가 감당해야 할 달란트이며 고귀한 사명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문학사를 통해서 이해인 만큼 다양한 작품을 발표한 시인도 드물고 그의 시를 즐겨 읽는 독자층이 두터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지엄한 말씀이 있는데 그의 시가 근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어 내려오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정권도 수없이 바뀌고 인간의 의식 구조와 가치관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변함없이 종파를 초월해서 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의 문학과 신앙, 언행일치를 요구하는 일반 독자들의 높은 도덕적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도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 맑은 감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시인이나 경건한 그룹에 속하는 성직자들에게는 자신들과는 구별되는 순결한 삶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 이해인은 열정적인 창작과 다작의 작품 활동을 통해서 꺼져가는 시단의 불꽃을 지켜 왔는데,

그의 작품들이 평론가들의 논의대상에서 늘 제외되고 한쪽으로 비켜 서 있는 것은 서정적이고

시류적인 경향의 시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인간이면 누구나 입성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세계,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의 장르 중에서도 소설이나 수필과 달리 현대시가 품고 있는 난해성 [obscurity] 때문에

독자들은 시문학과 점점 멀어지고 있어도 시인들은 독창적 문학성을 내세우면서 의도적으로 난해하고 이해가 어려운 시를 창작하고 있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산업주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 쾌락적인 현실과 비교되는 문학적, 감수성의 괴리감을 벌리면서 시 인구의 저변 확대에 실패하고 있다고 할 것이며 현대인들은 사랑, 동정심, 배려 같은 부드러운 성품을 자신도 모르게 상실하면서 이기주의적인 존재들로 급변의 탈바꿈을 하고 있다.

시인 이해인은 문학이 갖고 있는 난해성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방향을 상실한 채, 인생길을 걷고 있는 감성이 병든 인간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 할 뿐 아니라

문학적인 작품, 한 편의 시를 통해서 그들의 손목을 잡아끌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해석될 수 있는

종교적이고 소망적인 기도 시를 통해서 그들을 사랑의 가슴으로 차별 없이 끌어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로, 시인 이해인은 시대적인 현실배경이나 이즘을 초월, 신학적 진리에 가까운 독자적인 문학노선을 지향하고 있는데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신앙문학, 혹은 천국문학 노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평자는 그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1999년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내어놓은

그의 시집,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네.”를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문학적 작품을 통한 강론


이해인 시의 지배적인 톤은 부드러운 회초리 성격의 교훈적이어서 문학적 작품을 통한 강론을 대신하고 있다. 강론은 카톨릭 성직자들 중에서도 신부에게 주어 진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특권이고 집행이지만, 그의 기도 시들은 행간과 행간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하나의 강론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런 작품의 특성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시에서 또 다른 깨우침을 얻어 성공적인 신앙생활에 보조적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해인의 작품들이 일반 시인들의 글과 다른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 시인들의 글은 여러 번을 읽어도 이해가 어렵고, 설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결실을 얻기가 어려운데 반해서 이해인의 시는 그 글을 읽고 있노라면,

자신이 드리지 못한 기도문에 근접하게 되고 아, “나도 수녀님처럼 이렇게 사랑하며 기도하며 살아야지” 하는 신앙적 결심을 스스로 갖게 하는 은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 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가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빗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으실까

고통 속에서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 이는 들으실까


-마지막 기도 전문


이 시는 명 강론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이제/ 남은 것은 / 아무 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 가져 갈 것도 없는 / 가벼운 충만함이여./

이 세상의 밭에 욕망의 뿌리를 내리고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심어 놓고 가꾸고 돌보며 자고나면,

사과 개수를 세고 있는 인간들에게 세상 욕심과 애착을 비운 시인의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아, 어떻게 하면 저런 신앙상태에서 기도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하는

부러운 눈빛으로 동경하며 사모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기도라는 이 작품의 탄생 동기는 시인이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한 은총을 입어 갖게 된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3연에서 보면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실제적으로 한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는 운명의 날은 비밀의 보자기에 싸여 있어서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시인의 고백으로 보아 그는 기도하다가 지금 당장 주님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된 행복에 젖어 있다. 아마, 신랑 되신 예수의 품에 혹은 성모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그런 기쁨과 신앙적 쾌락에 젖어 있는 상태임을 알 수가 있다.

인간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행복을 경험하는 것은 두 가지뿐일 것이다.

육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머리끝까지 뻗어오는 절정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진한 키스로 사랑을 고백할 때와 영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깊이 기도하다 신비한 하늘의 위로와 천국의 환상을 똑똑히 보았을 때일 것이다.

그 순간 터져 나올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다면 /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하는 것이었고 이 한 편의 시는 강론보다 더 깊이 있게 기도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고로, 시인 이해인의 시, 마지막 기도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직관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기도문의 순수성 역시 그 극치를 담고 있어서 참으로 좋다.

여기에는 고상한 시어가 담겨 있지도 않고 특별한 시적인 기교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단지 순수한 마음상태 그대로를 한 편의 시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이해인 시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지막 결론 부분을 보면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서도 설레이는 /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

고통 속에서도 설레인다는 말은 역설의 시법이다. 인간은 아무리 성령 충만한 은혜를 입고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버렸다고 해도 천국에 입성을 하기 전까지의 기도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통 속에서 나는 설레이고 있다” 고 묘사를 함으로서 그 고통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가 더욱 애절하고 고귀하며 행복에 젖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

강론 중에서도 명 강론이 아닐 수가 없다.

어느 신부나 성직자가 이 보다 더 멋진 강론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나의 기도를/ 그 이는 들으실까/ 시인은 그 분이 듣고 있고 그 내용을 들으시며 흐뭇하게 웃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체험하고 있으면서도 시적인 운율을 살려가면서 그 이는 들으실까 은은하게 묘사한 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법이고 표현이다.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서 “물론입니다, 수녀님” “그럼요, 그 분은 듣고 계십니다.” 하는 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면서 기도하고 싶은 자발적 충동 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 이해인의 초기 시 [민들레의 영토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옷을 입을 수가 없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신부들만이 할 수 있는 강론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 강단에 서지 않고도 깊은 강론을 하고 있는 수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진정 축복받은 여인임을 알 수가 있었고,

시집 출간이 거듭될수록 그의 강론은 더 깊은 은혜의 강물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3: 시의 특징과 시인의 임무


시인 이해인 시의 특징은 현실적인 환경을 극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면서

가슴과 눈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에 소망을 두라는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초월하고 무시하고 천국을 바라보는 현실도피성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천국을 향해 한 계단씩 밟아가는 거룩한 본분을 자신이 직접 실천하면서

기도 시로 말하고 있다. 고로, 이해인의 시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변하지 않듯이

천국을 소개하고 있는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시적언어로 묘사하면서

시인이며 수녀인 자신의 존재적 지평을 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수녀이면서 시인의 임무를 메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신앙의 옹달샘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의 시는 인생을 총망라해서

천주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으면서 관심을 가지지 있고 .

그가 눈물을 한 번 흘리고 나면 그 눈물은 한 편의 시가 되어서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치료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해인 시가 지향하는 시의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죽은 문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살아 있다는 증거는 성도들의 삶 속에 파고들어서 눈물을 닦아 주고 소망을 주어서 절망을 극복하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녹아 그대로 살아 있다.


삶의 의무를

다 끝낸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 난 상자에 누워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 다 한 이야기

못 다한 사랑

대신 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하관 중에서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본문의 시를 보면 함께 주님을 위해 일을 하던

겸허한 마침표, 노 수녀 한 분이 주님의 부름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영원한 삶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죽음이란 관문은 베토벤의 명곡 [운명運命]의 심포니처럼 갑자기

찾아와 바바바방 하고 장엄한 생명의 문을 두드리는 통과의례인줄 알면서도

기독인들은 박수를 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잠시 이별의 슬픔에 잠기는 것은 육신의 형제자매로 만난

끈끈한 정과 인연을 애도하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슬퍼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시적인 묘사가 참으로 적절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인생의 철칙을

이 보다 더 잘 표현 할 수 있는 적절한 시어가 있을 것인가?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언뜻 스쳐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 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눈물도 성수처럼 맑을 수 있던

노 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 속에

하얀 구름으로 뜨네


-하관 중에서


하관 식에 참여한 시인은 허무하게 한 줌의 흙이 되어 돌아가는 노수녀의 삶의 종착을 보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시간적 차이는 있겠지만, 다 떠나야하는 운명을 보면서

땅 속에 묻히는 것은 노 수녀의 육신일 뿐, 영혼은 일어나 하늘의 부름을 받고 있는

그의 부활을 묘사하기를 / 노 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 속에/ 하얀 구름으로 뜨네/ 라고 하였으니 이해인 시에서는 절망과 슬픔, 그리고 비극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한 인간의 생명을 흙으로 돌려주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그는 부활의 긍정적 소망을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있는 시인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이다.

평자도 때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왜 시인이 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시를 쓰고 있고, 또 어떤 작품을 남기고 죽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글을 쓰는 시인이라면 수도복을 입은 특별한 신분, 존재가 아니라도 시인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그 임무 중에서 중요한 것은 메말라가는 인간의 감성을 촉촉이 적실 수 있는,

때로는 구체적 [concrete]이고 때로는 추상적[abstract] 인 작품을 적절히 배분해서

생동감이 있고 희망이 넘치는 시를 써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와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현 시대에 있어서 시인들은 그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갈급한 심정으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인간들의 호소를 외면한 채.

상업적 돈벌이에 급급해서 영혼의 울림이 없는 작품들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며 예술이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서정시를 고집하는 시인들이나 그 계보에 속한 비평가들은 다작을 하고 있는

이해인을 위시해서 여러 시인들의 산문에 치우친 작품들을 비평하고 있기도 하지만,

평자는 그들의 비평은 독선과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평이하게 읽혀지면서 삶의 힘과 용기를 주며 목마른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생수의 역할을 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즐겨 읽고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 20세기는 이 시대에 걸 맞는 작품을 들고서 독자들을 향하여 걸어가야 한다. 그 이유는 각 시대마다 그 시기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느끼하지만 구수한 피자를 원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구시대적인 전통 떡만을 먹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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