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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천하의 여걸 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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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돈길 작성일 2017-04-01 02:21 댓글 2건 조회 6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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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여걸 측천무후(則天武后)     2017.4.1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신비에 가깝다. 세계사에서 여걸, 황제. 여제는 누구인가? 단연코 측천무후일 것이다. 중국 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이다. 중국의 달기, 포사, 양귀비, 서태후도 아니다. 로마의 크레오파트라, 영국의 대처, 독일의 메르겔 등은 측천무후하고는 게임이 안된다.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모든 남자가 그녀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다.

당태종(이세민)은 무사학의 딸 무측천이 미모가 출중하다는 말에 입궁 시켜 14살에 재인(才人)으로 입궁 봉했다. 당나라 초기 후궁의 제도는 1순위 사부인이 121명의 후궁과, 2순위 이십칠세부의 27명중 1명이 무측천이다. 3순위가 팔십일어체에 81명, 작위가 없는 궁녀가 1천명이 넘는다. 이러한 모든 것이 엄격한 경쟁시스템에 의해서 2순위가 되고 1순위가 된다.

무측천은 반듯한 얼굴, 날씬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미모였다. 태종(이세민)이 만년에 중병에 걸리자 태자 이치(李治,고종)는 곁에서 시중을 드는 무측천을 보았다. 이때 태자의 눈에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태자는 미모에 매료되었다. 정욕의 힘은 위대해서 언제나 기회를 찿을 수 있었다. 태종의 사망이 임박하자 태자와 무측천은 이미 은밀한 관계가 되었고, 이때부터 무측천은 자신의 신분상승을 꾀했고 재인의 생활 12년동안 권력에 대한 산전수전 모두 보고 들었다.

그녀의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로 무조이다. 아버지는 상인(목재상)출신이고 어머니는 수나라 관왕(觀王) 양웅(楊雄)의 질녀이다. 그녀의 혈관에 흐르는 귀족과 상인의 피는 강렬한 권력욕과 호전적 성격을 형성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 무측천은 미인, 권력욕, 애교, 눈물, 인내, 영특 등 어느 누구에게도 경쟁에는 자신감과 꿈이 있었다.

드디어 태종이 사망하자 태자는 고종이 된다. 무측천은 고종의 총애를 얻어 10년 동안 4남 2녀를 낳아 주었다. 그리고 황후가 된다. 고종은 날이 갈수록 무측천을 믿고 또 그녀는 황제의 마음을 곁에 묶어 두는데 성공한다. 무측천은 끊임없이 여자 황제가 되기를 위해 노력을 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 계획과 책략에 치중했다. 여기에는 “음모(陰謀)와 양모(陽謀)”가 있다. 이 두 가지의 국면을 전망하는 탁월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 무측천은 자신의 친 아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한다.

황후의 자리가 안정되자 이번에는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는 일을 시작한다. 천도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의 운명을 걸린 대사이다. 그러나 문신과 무신 등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설득하여 성공한다.

무측천은 조정의 대신들 보다 뛰어난 것은 주어진 대세를 잘 활용했다. 대세는 한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의 추세이다. 대세가 바로 민심이기 때문에 이를 거스를 수 없다. 즉 그녀가 제기한 “건언십이조(建言十李條)”는 전쟁을 멈추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조치인데 이것이 대세에 따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당 태종은 늘 “권력의 수성의 어려움”을 봐 왔기에 교만하고 사치하지 않았다. 무측천은 시종일관 권력을 독점하고 신하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심지어 태자를 자살토록하는 독재군주였다. 어떤 사가들은 655∼705년까지를 “무측천이 통치한 50년” 또는 “무측천이 중국을 통치한 반세기”라고 말한다.

홍도 원년 (683년) 고종이 사망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 동안의 정치경험을 바탕으로 고종은 무측천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십 여일만에 왕실의 동요를 막고, 재상을 승진시키는 등 단기간에 국정을 안정시켰다. 때로는 무측천의 섭정에 반란도 있었으나 그녀의 결단력은 항상 단호했다.

그러나 무측천도 인간인지라 가는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듯이 60세 말을 바라 보면서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쌓이면서 음란한 생활이 시작된다. 첫 번째 남자가 설회의(薛懷義)였다. 설회의는 미남 일뿐 아니라 여황의 유력한 조수였다. 신하들은 미남자를 들인 일에 대해 비판을 하였으나 무측천은 남자의 황제는 많은 여성을 거느려도 되고 여자 황제는 왜 안되는가 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했다. 또 무측천은 성적만족이 건강관리 차원으로 보았다. 둘째 남자 시중은 장이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두 형제였다. 임어당(林語堂)은 장씨 형제의 등장으로 무측천은 동년시절로 돌아간 듯 많이 젊어졌다고 했다. 무측천은 신하들이 있어도 장난치며 놀기도 하고 장씨 형제를 총애했다. 또 이들이 정치에도 깊숙히 개입해도 무측천은 적극 보호했다. 무측천은 70세 중반을 넘어서도 미남자 장씨 형제에 빠져 정치감각 뿐만 아니라 병세가 위증해 간다.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도 궁중연회는 장씨 형제와 빠짐없이 참석했다. 당시 태상 소속의 악인(樂人)이 수 만명, 요리사가 2,400명이 였다고 하니 당나라 부패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결국 무측천은 장씨 형제의 향략에 빠져 나이든 호랑이가 후각과 시력을 상실한 것처럼 그녀는 서서히 지는 해가 되었다. 무측천의 정치에 민심은 돌아서고 아들 이현이 쿠데타를 성공한다. 한 순간의 음탕한 생활로 신룡 원년 겨울 그녀는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그녀의 유언은 “제호(帝號)는 없애고 고종의 건릉에 부장하라. 능묘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비를 세우라”(공과는 후인들에게 맡긴다는 의미). 51년간을 정권을 잡는 동안 대규모 농민반란은 한 번도 없었고 당시 비축 곡량도 가장 많은 태평성대였다. 무측천의 일생은 임기웅변에 정통한 일생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재인으로서 궁정투쟁을 통해 황후가 되고 천후로 추존된다.

고전의 매력은 현장에 답이 있다. 필자는 측천무후가 잠들고 있는 산시성을 금년 가을에는 꼭 가고져 한다. 그녀의 묘와 무명의 비석 앞에 서면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과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37회 최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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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님의 댓글

바람소리 작성일

당시 평균수명이 얼만지 모르겠으나 82세를 살았다면 측천무후는 하늘이 내린 여자지 싶다네
이 글을 읽어내리며 선덕여왕을 떠올렸다네
젊은 남자의 양기가 늙은 여성의 회춘엔 적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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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돈길님의 댓글

최돈길 작성일

바람소리에게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네. 측천무후 뿐만 아니라 서태후도 같은 부류이지. 단, 남자를 선택하는 차이가 다르더군. 역시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정치도 스므스하게 해결되는 것아 같아. 대처, 메르겔, 힐러리 등 선덕여왕도 자기의 조카 김춘추가 있으니 그나마 신라가 삼국통일했지. 박근혜 문제도 이젠 모두 역사에 맡겨야 하겠지만 지금은 승자(문씨)의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 그러나 그분도 5.18, 유병언, 가족 문제 등 자유스럽지 못한것 같네. 지난일이지만 박근혜도 남편이 있었다면 ㅎㅎ. 코멘트 고맙고 오늘도 행복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