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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조선의 여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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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제(女帝)는 누구인가?
2017. 5.4
조선왕조의 국정을 7년간이나 섭렵했고 성공리에 마친 정치인, 세자도 아닌 대군을 보위에 앉힌 정치인, 후궁도 한 명인 가운데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한 정치인, 손자를 왕으로 만들고 당대의 세도가인 한명회, 신숙주도 부복할 정도의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정치인, 세조· 예종· 성종 조에 걸쳐 실질적인 제왕의 자리에 군림한 정치인, 오직 백성과 국민만을 위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귀감을 준 정치인, 그리고 권좌에서 서슴없이 물러나 편하게 천수를 누리고 승하한 정치인. 그가 바로 조선왕조의 여걸·여제·여장부 “정희왕후”가 아닌가 싶다.
정희왕후의 인생사를 보면 타고난 출생부터 안정된 가정이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본관이 파평 윤씨로 아버지 판중추부사 윤번과 어머니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는 인천의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정헌대부 참찬의정부사 이문화의 막내딸로 1418년(태종18) 강원도 홍천 지방관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활달한 성격과 미모와 관상도 겸비하고 있었다. 『송와잡설』에 의하면 정희왕후의 언니(동희)와 흔인말이 있어 감찰상궁이 정희왕후의 집에 가니 어머니(주부인)가 언니(처녀)와 함께 나와서 앉았다. 정희왕후는 감찰상궁의 눈에 보였다. 감찰상궁은 정희왕후 어머니에게 “그 아기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겨눌바 아니니, 다시 보기를 청합니다.”라 대궐에 들어와서 아뢰어 드디어 정혼하였다.
정희왕후는 현재 주어진 나의 인생은 이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 더 넓고 더 높은 곳을 향한 것은 매우 감동적이다. 금붕어는 어항 속에는 5cm, 강물에는 30cm, 바다에는 1m로 자란다고 한다. 정희왕후는 어항속의 금붕어 보다는 바다의 금붕어를 원했다.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켰을때 정치적인 감각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심지어 정희왕후의 결단이 없었다면 계유정난이 성공했을지 의문이 될 정도로 그녀의 뚝심, 과감성, 판단력, 대담성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쿠테타의 사전 정보가 안평대군 쪽으로 넘어가 거병할 것을 망설일때 수양대군을 독려하고 갑주를 입혀 말에 오르게 한것이 바로 정희왕후였다는 것은 흔치 않은 그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본처보다 후처에게 정이 많이 가고 후처의 세끝 혀도 무섭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후비 수빈도 궁에 살아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희왕후는 솔직하고 의리가 있다. 신숙주를 비롯한 조정 중신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했다. 그녀는 “나는 문자를 몰라 국정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사양했다. 당시의 문서는 한자가 대부분이고 한자를 아는 사람들은 남자들이였다. 승정원(요즘의 비서실)에서 한자 번역을 해서 정희대비에게 전달하였다. 이 방식은 여성 왕에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문에 능숙한 여성을 찿던중에 정희왕후가 믿을수 있는 조대두라는 여종을 채용했다. 그러나 조대두의 탐욕이 극심 해서 즉 국정농단으로 정희왕후에게 어려운 처지에 처하자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1476년 성종 7년 1월 13일)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쉽지않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 정희왕후는 여걸이다.
중국 역사에 유일한 여자 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82세까지, 청나라의 서태후도 78세까지 그리고 정희왕후도 66세라면 천수를 누렸다고 보겠다. 이들은 똑같이 남편이 일찍 사망했다. 그리고 여걸들은 천수를 누렸다.
성종14년(1483) 3월 온양에 갔던 정희왕후는 병이 깊어져 궁궐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 역대 왕비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일생을 마친 여장부였다.
그녀가 묻힌 광릉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으로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세조의 유언에 따라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현실(玄室, 임금을 사신을 안치하는 석실)이 없이 회격(灰隔, 일반인들과 같은 관을 구덩이에 넣고 석회로 메움)으로 대신했고, 병풍석도 두르지 않았다.
인간은 죽을 때가 되면 ‘않던 짓’을 하고 착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남편 세조는 양심(兩心, 두 가지 마음)과 양심(良心, 바른 마음) 사이에 어느 쪽일까?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아버지와 형님이 아끼던 신하들(사육신)을 너무나 많이 죽였다. 필자는 광릉을 돌아 서면서 증조 할아버지 이성계, 할아버지 이방원, 아버지 세종의 아들 세조, 이들 피의 DNA는 역사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훈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10년 전 MB와 경선에서 패하고 박근혜는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이제 잊어 버립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우리 정치사의 명연설로 남았다. 그러나 3.12 저녁 삼성동 사저로 돌아왔다. 명연설을 기대했다. 국민들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퇴장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37회 최 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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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바람소리님의 댓글
바람소리 작성일
답변 수정 삭제
군왕은 양심(良心)으로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兩心) 즉 天心과 地心으로 정치 하는 것 아닐지
왕위(王位)는 보편적인 윤리에 구애받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적이란 정적을 의미 하는 것이고 역적을 용서한 왕은 반드시 位를 잃는 법이다
다시말해 역적 제거는 살인행위가 아니라 군왕이 반드시 지녀야할 정치적 결기란 뜻이다.
박근혜의 정치적 구호는 좋았지만 실천에 대한 강력한 결기부족에 의해 位를 잃어지 싶다.
문화혁명의 중심엔 세종이 있고 이씨 오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굳건한 정치기반을 다진 왕은
세조거니 - 첨언컨대 이건 소생만의 단순한 역사관일 뿐
최박사의 해박함에 많은 것을 배워간다네.
우리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보세
최돈길님의 댓글
최돈길 작성일
바람소리에게
매번 면도칼 같은 코멘트 감사하네. 사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디지었다 허물었다, 넣었다 빼었다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게 부끄럽기만 하네. 건강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