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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부산여행 - (3) 감천 문화마을-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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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봉섭
작성일 2017-05-1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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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 이다. 감(甘)은 검에서 온것이며, 검은 신(神)이란 뜻이다. 천(川)은 내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다른 유래로는 물이좋아서 감천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내를적어 감내(甘內) 또는 감래(甘來)라고 하였고 다내리(多內里)로 부르기도 하였다. 반달고개는 감천동과 아미동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왕래가 잦았던 고개로 감천2동에서 서구 아미동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천마산과 아미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태극도는 1918년에 조철제(趙哲濟)가 증산사상에 기초하여 세운 종교로서 4천여명의 태극도 신도들이 이 반달고개 주변에 모여 집단촌을 만들었는데 이 태극도 신앙촌이 중심이 되어 1958년 현재의 감천2동이 만들어 졌다. 감천동의 특징 감천동은 한국전쟁 당시 힘겨운 터전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 근현대사의 흔적과 기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산복도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문화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독특한 계단식 집단 주거형태는 감천동만의 독특한 장소성을 보여주고 있다. 뒷집을 가리지 않게 지어진 주택의 미덕이 살아 있는 감천동은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예전의 추억을 회상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서로를 배려 하면서 삶을 부비고 사는 민족 문화의 원형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부산은 한국전쟁 중 두차례나 대한민국 수도였던 적이 있었다. 최초의 내각책임제 개헌(1951년)이 이뤄진곳, 최초의 화폐개혁(1953년)이 피란수도 부산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평지가 귀한 부산에 1945년 광복때는 100만 해외동포가 부산항으로 들어왔고, 6.25 전쟁 중엔 피란민 중 40만명이 부산에 보따리를 풀었다. 인구는 광복당시 28만명에서 정부수립(1948년) 때 50만, 6.25 전쟁 중엔 88만, 휴전 후엔 110만 명이 됐다. 부산은 이미 수용능력의 두배를 넘긴 상태였다. 피란민을 위해 방하나 내어주기 운동도 벌어졌다. 하지만 태부족, 그래서 피란민 스스로 거처를 마련했는데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다리밑이고 산등성이고, 그게 감천문화마을이고 영주동.영도섬의 산동네 절벽마을이다. 맨 위 흑백사진은 세대 다큐멘타리 사진가 최민식의 "1960년 부민동" 판자촌 모습이다 (2017.4.29일자 동아일보 "부산 역사기행"중에서)과거 흑백 사진속 감천마을이 세월의 흐름속에서 수리하고 분장(색칠)하여 위 사진들처럼 최근 이렇게 아름다운 산촌마을을 이루고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고, 골목길집들은 각종 식당이나 기념품가게를 내 관광객들을 맞고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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