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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 "할아버지"로 불리워 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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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퍼온사람 작성일 2006-06-15 07:51 댓글 0건 조회 3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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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외출을 하려고 집을 막 나서는데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세 명의 꼬마 녀석들 중 한 명이 나를 올려다 보더니 하는 말 “ 1층 할아버지다.”
그 말에 나는 그 녀석에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 할아버지 아니야.”
그러자 그 곁에 있던 다른 녀석이
“그럼 아저씨예요? “
“그래 아저씨야”
머리가 반백이고 생활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자기네들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할아버지인 내가 아저씨라고 우기자 아저씨냐고 물어본 그 녀석이 자기 친구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
“ 아저씨래 (웃음) ”

  그래 그렇구나. 나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구나.
내가 아무리 우겨도 가식 없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월이 새겨진 내 모습은 틀림
없는 할아버지였을 것입니다.
시내로 걸어 나오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증폭되어 귓전을 울려대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내 모습을 길가의 쇼윈도
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곳에는 아저씨라고 늘 생각했던 한 할아버지가 서있었습니다.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나는 어느새 종점이 얼마 남지 않은 길 위에 서서 그래도
종점이 아직은 멀다는 최면을 나 스스로에게 걸어놓고 멋대로 만들어지는 마음
작용의 각본에 조연도 아닌 “노인1”의 단역을 연기하는 배우로 서있는 나를 문득
깨닫는 순간 나는 공허로운 웃음을 한 움큼 토해냈습니다.

  그날 저녁 조용히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헌영아.  주관은 아저씨지만 객관은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인 네가 앞으로 할 일은
무엇일까?” ………

  할아버지로 존재하는 내게 남겨진 시간들이 새로이 씨를 뿌리고 새싹을 가꾸기
에는 부족하다는 것에는 어리석은 나 스스로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일은 가꾸지 못해 번뇌의 잡초만 무성한
마음의 밭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언뜻언뜻 비추어지는 따사로운 무념(無念)의
햇살에 영글어가는 한 톨의 수심(修心)과 한 이삭의 수행(修行)이라도 애써 거두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과 이생에서 지은 미세한 업(業)이라도 소멸시킴으로써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윤회의 질곡을 벗어나 수미산의 정상에 올라 비로소 꺼지지 않는
지혜의 등불로 이 무진번뇌를 태우며 찬연히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오랫만에 서재에 놓아두었던 대금을 꺼내어 가락도 맞지 않는 한 자락의
운율로 할아버지 주연의 관중 없는 단독 공연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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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요.

(하루 한가지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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