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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박정희 대통령 미워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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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미워하지말자
2017.11.19
이제 우리는 솔직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475년의 역사,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518년의 역사. 이들의 역사에서 국민으로부터 숭상하고 존경받는 인물은 누구인가? 고려의 강감찬, 고려말의 최영과 정몽주, 조선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정도이다. 세종대왕도 허균의 『홍길동전』을 보면 세종 시절 굶어죽고, 얼어죽고 라는 문장을 보면 성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도 잊혀져 있다가 1960년 들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여하튼 인물평에 대해 인색한 민족인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대통령)은 18년간의 경제기적은 세계가 인정한다. 단, 산업화를 달성했으면서 개발초기에는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지 못했다. 이것은 동시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근대화의 모델인 영국을 포함하여 산업화 초기에는 경제와 정치를 함께 발전시킨 나라는 없다. 당시 우리의 실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배고픔의 설움, 보리고개를 모르고 자란 세대이다. 박대통령이 선택한 것이 선(先) 경제성장 후(後) 민주화였다. 즉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비원(悲願)을 현실화시킨 박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이 증명되고 있다. 포스코, 반도체, 자동차, 조선이다. 박대통령 이후 7명의 대통령 중에서 어느 누구도 박대통령의 업적을 능가하는 대통령이 없다.
4․19학생의거에 의한 민주당 장면 새정권의 사회불안은 더 혼란하였다. 좌익대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남북학생회담을 하자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사회혼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위해 조국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5․16혁명의 동인이였다. 특히 박대통령이 노동자를 착취했다고 한다.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분석한 글을 보면 전태일은 16살이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만인 19살이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에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천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이것을 노동착취라고 하기는 맞지않다. 물론 개발초기에는 섬유산업인 경공업으로 시작했고 구로공단도 당시에 생겼다. 이런 과정은 경공업에서 70년대 들어 중화학 중심의 산업의 변천과정이다. 박대통령은 친일파라고 하는데 미당 서정주의 시가 명쾌한 대답이다. “태어나니 하늘은 일본 하늘이었다”. 이외에도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는 박대통령이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서도 3차까지, 장면 정권에서 4차 그리고 5차에서 박대통령의 정권에서 완성된 것이다.
박대통령의 업적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자 야당의 죽기 살기의 반대와 양재역 부근에서 데모와 자살소동을 기억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세계가 부러워하는 2년 5개월만에 완공한 것은 전설적 이야기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있겠는가
최근 박대통령의 동상건립에 일부 시민단체는 “적폐청산의 인물이 공공의 땅....”, “독재자”라고 반대한다. 필자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다. 독재자란 무엇인가? 만장일치, 세습체계, 공개투표 등 인데 이에 적합하지 않다. 박대통령을 비롯한 위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공(功)과 과(過)가 있다. 미국 대통령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된다. 미국의 링컨 기념관에는 6m가 넘는 조각상을 자랑한다. 링컨 역시 공과 과가 있다. 5년간의 남북전쟁으로 62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미국 국민을 공포와 고통으로 몰고 폐허를 만든 장본인이다. ‘철강왕’ 록펠러 역시 세계 최고갑부로서 미국을 강대국으로 세웠지만 ‘비도덕적’인물로 유명하다. 기름사업의 90%를 독점하면서 상대회사를 파산으로 몰았다. 그러나 링컨과 록펠러가 없었다면 미합중국과 산업화가 되었을까 이다. 이제 무조건 ‘도덕적’ 잣대로만 보지말자. 박대통령은 2차대전 이후 150개국이 넘는 신흥공업국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대한민국이다. 이제 우리는 박대통령을 위인으로 만들자.
필자는 무엇보다 박대통령에 대해 두가지 점에서 인정하고자 한다. 첫째는 안보(安保)다.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도 흉내도 못내는 김일성으로부터 사과를 받아 냈다. 즉 1976.8.18일 판문점에서 미군 2명을 죽이는 북한 도끼만행 사건으로 안보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특히 박대통령․카터․키신저는 월남전에 대해 박대통령 전망이 적중했다. 즉 1975.4월 월남은 패망한다. 이로 인해 카터의 미군철수에 박대통령은 핵무기 개발로 응수하여 카터는 미군 철수를 포기했다. 둘째가 개인의 청렴성이다. 개인의 부정축재가 없었다. 좋은 예가 1971년 3.13일 미국 무기제조회사 콜드사(社)로부터 M16총을 구입했다. 그 댓가로 콜드사의 중역 심슨이 박대통령에게 감사의 인사로 100만달러(요즘의 리베이트)를 주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 3대가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네. 이 달러로 M16총을 구입하겠오. 심슨은 소총을 더 보내기로 약조한다. 박대통령은 ‘부정부패’, 도덕적 타락자가 아니고 청렴한 위인이다. 친인척관계도 깨끗했다. 박대통령의 형님(박동희)은 아우가 대통령이 돼도 늘 지게를 등에 지고 살아온 농부였다. 아우에게 누가 될까봐 마을에 들어오는 전기조차도 맨 나중에 가설토록했다. 1․2차 대통령 취임식 때도 총무처 장관의 초청을 거절했다. 박대통령은 형님의 농사일을 하는 논에 가서 직접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얼마나 멋진가.
이제 우리는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한다면 역사와 역사적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미워하지말자”.
37기 최돈길
* 본 글은 『박정희 바로보기』2017.10.16 송복 외 많은 부분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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