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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농축구가 좋아요 작성일 2014-09-23 22:02 댓글 0건 조회 3,1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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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은 90년대를 호령한 슈퍼스타였다 ⓒ손춘근
승부욕이 대단했던 김현석(45)은 울산 현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힘과 스피드는 평범했지만 신들린 퍼스트 터치와 한 박자 빠른 절묘한 슈팅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터트리는 프리킥 득점은 상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K리그 통산 371경기 출전에 110골 득점(통산 6위). 도움은 54개나 기록해 한때는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기도 했다. 비록 신인상은 놓쳤지만 K리그 우승, 컵대회 우승, 최우수선수상, 득점상, 올스타전 MVP 등을 모두 수상한 기록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1990년 미드필더로 입단해 공격수로 정점을 찍고, 2003년 수비수로 은퇴한 김현석은 울산의 레전드임은 물론이고, K리그의 한 시대를 풍미한 보물 같은 선수였다.


 

1996년 K리그를 우승 당시.. 정몽규 회장의 모습도 보인다 ⓒKFA 홍석균
강릉농공고-연세대 거치며 라이벌전 사나이로 성장

그는 강릉농공고를 졸업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강릉농공고로 갔다. 당시 강원도에서는 강릉농공고와 강릉상고의 라이벌전이 대단한 이슈였다. 흔히 ‘농상전’이라 불렸는데, 두 팀이 붙으면 약 3만명 정도의 관중이 몰렸다고 한다.

“그때 강릉 인구가 10만 정도였는데, 3만이 운동장에 오면 도시는 비었다고 봐야죠. ‘농상전’이 열릴 때는 문을 연 식당이 없었대요. 굉장히 큰 행사였죠.”

고교 졸업 후 연세대로 진학한 김현석은 ‘연고전’을 치르면서 압박에 강한 선수로 성장한다. 이는 향후 그를 큰 경기에 강한 선수로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가 중압감이 더 컸어요. 졸업한 선배들이 굉장히 험악하게 굴었거든요.(웃음) 정말 살벌했죠. 정신 교육한다고 혼나는 게 일이었어요. 안 혼나면 찝찝했죠.(웃음)”

김현석은 고교 시절에도 맹활약을 펼치며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스스로는 부족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을 ‘연습 벌레’로 기억했다.

“항상 나보다 잘하는 선수를 보면서 운동을 했죠. 휴가 때도 운동을 빼 먹은 적이 없어요. 특출난 장기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야간 운동을 진짜 많이 했어요.”

“타이어도 많이 끌었지만, 밤에 운동을 하다 보니 볼에 대한 감각이 좋아졌죠. 밤에는 공이 어느 정도 오는지 모르잖아요. 나중에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야간 훈련을 통해서 감각이 생긴 것 같아요.”

 



 

1998년 아디다스 코리아컵을 우승한 김현석 ⓒKFA 홍석균
‘연고대’ 주장이 한 팀으로.. 논란이 된 울산 꼴찌 사건

연세대의 주장을 지낸 김현석은 드래프트를 통해 현대에 입단한다. 당시만해도 현대의 연고지는 강원이었기 때문에 강릉 출신 김현석을 영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대는 고려대 주장이었던 송주석까지 영입하며 큰 논란이 일었다.

“전년도 꼴찌가 두 명을 데려갈 수 있었거든요. 현대가 우리 두 명을 데려가기 위해서 일부러 꼴찌를 해서 말이 많았죠.”

김현석과 송주석은 태생적 라이벌이었다. 한 팀에 있으면서도 쉽게 융화되지 못했고, 첫 해에는 신인상을 두고 경쟁도 펼쳤다. 그러나 미드필더였던 김현석은 공격포인트에서 밀려 송주석에게 신인상을 내줬다.

“내심 엄청 기대했어요. 저는 볼란치(수비형 미드필더) 였는데도 5골 3도움을 했거든요. 그런데 주석이는 3골 7도움을 해서 주석이가 받았죠. 주석이랑 친해지는데 4~5년 걸렸죠.(웃음)”

학창시절부터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오가던 김현석은 프로 2년차가 되자 공격수로 자리 잡았다. 울산에 차범근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공격수로 올라서며 많은 골을 넣자 김현석은 ‘차범근의 아들’로 불렸다.

“처음에는 2군으로 보내셨어요. 충격 많이 받았죠. 그러다 (강)득수 형이 발목을 다쳤거든요. 저에게 기회가 왔고, 차 감독님이 첫 승을 할 때 제가 결승골을 넣었죠. 그 해에 14골을 넣으니까 감독님 아들이 된 거죠.(웃음

1998년 K리그에서 수원을 상대하는 김현석 ⓒKFA 홍석균
대표팀에서의 부진

김현석은 대학 시절부터 대표팀에 선발됐다. 1989년 화랑팀에 선발된 것이 최초였다. 하지만 활약은 미비했다. 1990년에는 ‘이탈리아 월드컵’ 실패로 인해 세대교체의 기수로 주목 받았으나 커다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대표팀에서는 볼란치를 봤어요. 최전방에 (황)선홍이 같은 애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눈에 띄지는 못했어요.”

그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간 대표팀을 드나들었다. 이 기간 동안 K리그에서는 최고의 경기력을 펼쳤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명단에서 제외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는 출국 이틀 전에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 큰 충격이었다.

“집사람이 굉장히 도움을 줬죠. 월드컵 안 가면 어떠냐고, 그래도 알아줄 사람은 다 알아준다고. 혼자였다면 슬럼프에 빠질 수 있었는데, 가족이 있으니까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대표팀과 인연을 맺지 못한 김현석은 1999년 브라질과의 친선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과 작별했다. 통산 A매치 기록은 22경기 출전에 5골이다.

1999년 K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한 김현석.. 안정환(은퇴)과 신홍기(전북 코치)도 보인다 ⓒKFA 홍석균
1996년, K리그 우승과 동시에 MVP 수상

1994년 상무를 제대한 김현석은 울산으로 복귀했다. 차범근 감독이 떠나고 고재욱 감독이 부임한 후였다. 고재욱 감독과의 궁합도 좋았다.

“95년도에 아디다스컵에서 득점왕을 했고, 우리가 우승을 했죠. 리그에서도 성적이 괜찮았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쯤에는 매년 10골 이상을 넣었을 거에요.”

아디다스컵 우승으로 상승세를 탄 울산은 1996년 K리그까지 제패했다. 주장이던 김현석은 9골 9도움을 기록하며 MVP까지 수상했다.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득점이었다.

“96년도에 수원과 챔피언 결정전을 했죠. 첫 골을 프리킥으로 넣었는데, 큰 경기에서 골을 넣을 수 있었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에 와서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귀에 배겼어요. 우승에 대한 갈망이 굉장히 컸죠. 그런데 제가 주장을 할 때 우승을 하니까 모든 게 다 이뤄진 것 같았죠. MVP도 받고 겹경사였죠.”

K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김현석은 전성기를 보냈다. 1997년에 13골, 이듬해에는 17골을 넣었다. 매년 득점왕을 독차지했고 온갖 기록을 갱신했다. 특히 1998년에는 고정운(당시 성남)과 40-40 클럽을 놓고 경합을 펼쳐 K리그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40-40에 대한 욕심은 많았어요. 그런데 (고)정운이 형이 먼저 했죠. 제가 골은 많이 넣었는데 도움이 부족했어요. 그때 성남에는 김용세, 이태홍 같이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정운이 형은 도움을 많이 하는 위치기도 해서 제가 이를 갈았죠.”

최초의 40-40클럽을 놓친 김현석은 2001년 사상 최초로 50-50클럽에 가입하며 아쉬움을 떨쳐냈다.

 

2002년 울산으로 복귀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김현석 ⓒKFA 홍석균
J리그에서 펼친 제2의 전성기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던 김현석은 2000년 J리그 가와사키 베르디로 이적했다.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였기에 부담은 없었지만, 타향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현역 대표도 아니고, 나이도 많고, 한국인이니까 처음에는 투명 인간 취급을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개막전에 나가서 동점골을 넣고 경기 MVP가 됐죠. 여섯 경기를 하는 동안 여섯 골을 넣었거든요. 그러니까 먼저 말도 걸고, 저를 어려워하더라고요. 전반기에 12골 넣어서 J리그 득점 공동 선두였어요.”

그의 성공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시 스포츠뉴스에서는 그가 골을 넣을 때마다 득점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고,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비록 후반기에 부상을 입으며 16골에 그쳤지만 그는 다시 한번 상종가를 누렸다.

“시즌을 마쳤는데, 한국에서는 울산이 꼴찌를 했더라고요. 구단에서 돌아오라고 전화가 왔어요. J리그에서는 이미 다른 오퍼가 있었죠. 돈보다 의리를 선택했는데, 집사람 설득하느라 고생 좀 했죠.(웃음)”

당시 일본 클럽에서 제시한 금액은 울산 연봉의 4배 정도였다고 한다.

울산의 재건.. 그리고 은퇴

다시 돌아온 울산은 김정남 감독 체제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현석은 체력의 어려움을 느끼고 은퇴를 결심하지만, 코칭 스태프의 조언으로 수비수로 변신했다. 변신은 대 성공이었다.

“그때 최소 실점이었어요. 스리백을 했는데, 제가 스위퍼를 보니까 다른 두 명은 죽어났죠. 저는 뒤에서 조율만 한 거였죠.(웃음)”

김현석의 복귀로 힘을 얻은 울산은 2002년 준우승까지 차지했다. 팀이 정상 궤도에 오르자 김현석은 다시 은퇴를 결심했다.

“마흔 살까지 뛸 수도 있었죠. 하지만 성적이 괜찮으니까 어린 선수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2003년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했는데, 협회나 연맹에서 배려를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선수 생활을 마감한 김현석은 곧바로 지도자로 변신했다. 선수시절 명성을 떨쳤던 프리킥 능력은 이천수(현 인천)에게 영향을 미쳤고, 악바리 같은 근성은 울산 전체에 퍼졌다. ‘철퇴축구’의 모태가 된 셈이다. 지난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의 우승 현장에도 김현석 코치가 있었다.

“나의 선수 시절은 인생의 전부였다고 생각해요. 선수 때만큼의 열정이나 팬들의 환호가 앞으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굴곡이 별로 없었죠. 하지만 월드컵에 대한 아픔은 있어요. 선수로는 월드컵에 못 나가봤지만, 지도자를 하면서 월드컵을 나가는 것이 최종 목표예요. 노력하다 보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글=손춘근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3년 5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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