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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화평선수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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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ckim 작성일 2007-07-11 11:11 댓글 0건 조회 3,1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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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청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 이제는 알 것 같아”
[ 2007-07-11 ]

강릉시청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윤화평 ⓒ스포탈코리아

‘한국수력원자력 2007 내셔널선수권’이 열리고 있는 강원도 양구. 10일 예선 마지막 경기인 강릉시청과 천안 FC를 취재하러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워하며 다가와 인사하는 그 주인공은 2002년 초고교급 스트라이커로 칭송받으며, 수원에 입단했었던 윤화평(24세)이었다.

2002년 수원에 입단했던 윤화평은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 기회를 잡지 못한 채 2003년 경찰청에 입대했고, 2005년 제대한 이후에도 K리그에서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스트라이커로서의 재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윤화평이었지만, 프로무대는 냉혹했고, 2007 시즌을 앞두고 그는 수원을 떠났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윤화평에게 안식의 장소를 제공해준 팀은 고향팀 강릉시청이었다. 몇몇 프로팀이 윤화평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입단 제의를 하기도 했지만, 윤화평은 강릉농공고 시절의 포스가 생생한 강릉에서 새롭게 출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U-19 대표팀과 국가대표상비군을 지냈던 윤화평이 내셔널리그에서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황선홍을 능가할 것으로 기대했던 초특급 유망주

2002년 수원삼성은 고교무대를 평정했던 초특급 유망주 스트라이커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수원 관계자들은 “황선홍을 능가할 수 있는 특급 재목”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그의 영입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수원이 최고 몸값을 제시하며 데려온 그 선수는 바로 2001년 강릉농공고를 고교 정상팀으로 이끌며 고교랭킹 1위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았던 윤화평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엄청난 기대를 받고 수원에 입단한 윤화평은 두터운 수원 공격진의 벽을 뚫지 못했고, 입단 첫 해 1경기 출장에 그쳤다. 당시 큰 기대를 받으며 수원에 입단한 윤화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려한 선수층이었다. ‘고-데-로’콤비로 불리웠던 고종수-데니스-산드로의 삼각 편대와 서정원이 공격을 이끌고 있었고, 우승을 노리는 팀 사정상 새내기 윤화평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기술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배포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성공할 수가 없었죠. 당시에는 산드로나 데니스 같은 선수들이 워낙 잘했었고, 또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했어요. 수원은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1-2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지 못하면 힘들어지죠.”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한 데뷔 시즌을 보낸 윤화평은 다음 해인 2003년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청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2005년 제대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공격수들은 더 많이 늘어났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던 윤화평은 2006년에 4경기에 출장했으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한 채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쉬움이 커요. 제가 컨디션이 진짜 좋았을 때도 결국 외국인 선수들의 벽을 넘지 못했어요. 나이가 어리다보니 잘 풀리지 않자 방황도 많이 했고요. 지금 하태균 같은 선수들 보면 기회를 잘 잡은 것 같아요. 그런 차이에요. 그 선수들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았고, 저는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했던 것이죠.”

스스로도 언급했지만, 사실 축구계에서는 윤화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요인으로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의 자기 관리 부족을 꼽기도 했다. 재능 면에서 탁월하다는 평가와 함께 관리적 측면의 아쉬움이 늘 지적되곤 했다. 윤화평 스스로도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너무 어렸고, 아무 것도 몰랐죠. 왜 나를 쓰지 않나라는 자책감에 자포자기하고 방황했어요. 술도 원 없이 마셨죠.(웃음) 감독님이나 코치님들과도 미팅을 많이 했고 저에게 시간도 주셨는데, 어리다보니까 그 조언들을 제대로 새겨듣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해볼 건 다 해봤기 때문에 이제는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군대 문제도 해결했고, 앞으로 더 뛸 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열정만 있다면 지난 세월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향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윤화평 ⓒ스포탈코리아

힘들었던 시기, 고교 선배 박문영 감독의 제의로 강릉으로

수원의 화려한 공격진에 막혀 1군 무대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아직 24세의 젊은 나이였던 윤화평이었기에 여전히 다른 K리그 팀들에게는 영입을 고려해볼 만한 대상이었다. 실제로 몇몇 K리그 팀에서 그에게 영입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윤화평의 선택은 고향팀인 강릉시청이었다.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그이기에 내셔널리그로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윤화평은 고향에서, 따뜻한 위로와 환대를 받으며 다시 도약하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냉혹한 프로세계에 조금 지쳐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그를 강릉은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

“작년 후반기에 발목을 다치는 등 이래저래 4개월을 쉬었어요. 그런 와중에 고교 선배님이기도 하신 박문영 감독님에게서 전화가 왔죠. 한번 만나자고 하셔서 직접 뵈었고, 그 만남을 통해서 강릉시청 행을 결정했어요.”

“사실 그 당시에 전남을 비롯한 몇몇 팀과 이야기가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박 감독님께서 강릉시청도 프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강원도에 프로팀이 없기 때문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한다면 K리그로 진출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고향인데다가 K리그에 대한 의지도 있다고 하니 여기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죠.”

“1월부터 훈련에 합류했는데 팀 분위기가 참 좋아요. 개개인이 가정이 있고 대부분 프로 생활도 경험했던 선수들이라 이기려는 의지도 강하고, 자신감도 커요. 내셔널리그에서 정상권 팀이 됐죠.”

무엇보다 경기를 뛸 수 있다는 것이 윤화평에게는 기쁨이다. 주전 공격수로 나서 피치를 누비는 즐거움을 잊고 있었던 윤화평은 지금 강릉시청에서 그 즐거움을 다시 맛보고 있는 중이다.

“그 동안 수원에서는 경기를 거의 나가지 못했잖아요. 여기서는 항상 경기에 나서니까 너무 즐겁죠. 감독님이나 코치님도 저를 인정해주시고, 더군다나 지역 출신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환대도 받고 그래요. 행복하게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웃음)”

강릉시청을 내셔널리그 정상으로 이끌고 싶어

축구팬이라면 다들 알다시피 강릉농공고와 강릉제일고의 라이벌 대결로 유명한 강릉의 축구 열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강릉농공고에서 그 열기를 체험했던 윤화평은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며 축구를 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어야 했던 그이기에 더욱 힘이 난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강릉의 축구열기는 정말 대단해요. 내셔널리그 팀들 중에 이렇게 관중이 꾸준히 들어오는 팀은 없을 겁니다. 3천에서 5천명 정도는 꾸준하게 경기장을 찾아주세요. 시민들도 열광하고, K리그 팀을 원하고 있어요. 팀에서도 전반적인 지원을 더 많이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울산미포조선에게 아쉽게 우승을 내줬어요. 승점도 같았는데, 골득실에서 밀렸어요. 후기리그에서 다시 도전해봐야죠.”

팀은 울산미포조선과 끝까지 우승을 다투는 등 성공적인 전기리그를 보냈지만, 윤화평은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한다. 4개월 동안 운동을 쉰 상태에서 1월부터 다시 몸 만들기에 들어섰기에 전기리그에서는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니었다는 자체 평가.

“전기리그에서 1골-1도움을 기록했는데, 사실 플레이는 형편없었어요. 그 동안 운동을 많이 쉬었기 때문에 경기에 꾸준히 출장하고, 팀이 이기는데 보탬이 되는 플레이에 전념했죠. 여기에 작년에 다쳤던 발목이 여전히 좋지 않아서 고생하기도 했고요.”

“감사하게도 코칭스태프와 팀에서 제가 무리하지 않게 잘 관리하고 도와주셨고, 저를 믿고 경기에도 꾸준히 출장시켜주셨어요. 아마 후기리그에서는 팀도 그렇고, 제 자신도 그렇고 많은 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트라이커로서의 플레이를 보여드릴 거예요.”

“후기리그에서는 우승을 차지해서 울산미포조선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을 겁니다. 우리 팀은 이기려는 의지가 그 어느 팀보다 강하기 때문에 가능할 거라 믿어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는 윤화평 ⓒ스포탈코리아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뜻,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

어린 나이에 이런저런 세파를 많이 겪었던 탓일까. 미래에 대한 윤화평의 꿈은 매우 소박했다. 내셔널리그 득점왕, K리그로의 재도전 같은 꿈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것이 그의 현재 마음이다.

“현재로선 거창한 목표 같은 것은 없어요. 득점왕을 차지하겠다, 다시 K리그에서 뭘 해보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중요한 순간에 골을 넣어 팀을 이기게 만들고, 그런 것을 보고 강릉 시민들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될 것 같아요. 그 정도면 보람도 느끼고 만족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강릉 출신이기 때문에 여기서 팀을 K리그로 끌어올리고 싶어요. 다른 팀이 아닌 고향팀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거예요.”

한 마디, 한 마디 진중하게 내뱉는 윤화평의 모습은 분명히 예전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고교 무대를 평정하고, 엄청난 관심 속에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던 시절의 패기와 당당함은 많이 엷어졌지만, 그 자리에는 축구에 대한 진지함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겸손함과 굳센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뜻을 잘 몰랐어요. 그냥 재능을 과신하고, 대강대강 훈련을 하고, 경기를 뛰었었죠. 이제는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요. 이 뜻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부터 시작해야죠. 후기리그에는 시민들이나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이 원하는, 그런 축구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K리그로 올라가야죠.(웃음)”

아직 24세의 나이. 축구선수로서의 전성기를 28-29세 정도로 봤을 때 아직 근처에도 가지 않은 젊은 나이다. 여전히 윤화평의 재능은 유효하고, 그의 재능을 기대하는 팬들이 존재한다. (적어도 나는 윤화평이 멋지게 부활할 날을 아직도 고대하고 있다.) 이제 그가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윤화평이 마지막에 말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이 마음을 항상 간직할 수 있다면 윤화평은 멋지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강릉시청을 K리그로 올려놓고, K리그에서 보란 듯이 득점포를 가동한 뒤에 다시 한번 윤화평과 인터뷰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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