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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강릉농고의 우승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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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문
작성일 2011-06-2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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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2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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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한반도는 휴일을 맞아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동이 틀 무렵 동족상잔의 비극은 시작됐다. 북한군이 탱크와 화포를 앞세워 기습적으로 남침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6.25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잊어서는 안되고 잊을 수도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강릉농공고 축구부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사진=연합뉴스)
재창단 된 강릉농고 축구부와 최재하 교사
강릉농고 축구부는 1941년 창단됐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부 선수 중 일부가 일반 성인팀 소속으로 대회에 나간 게 발각돼 해체되고 말았다. 학교 내부에서도 축구부 존폐를 놓고 말이 많았지만 결국 오랜 회의 끝에 해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광복을 맞자 학교 측에서는 새 출발하는 의미로 다시 한 번 축구부를 창단했다. 1945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재창단 한 당시 강릉농고 축구부는 오합지졸이었다. 워낙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훈련은 물론 제대로 된 지도자도 갖추지 못했다. 한 차례 해체를 겪으며 학교 측의 눈 밖에 난 것도 이유였다. 선수들은 밤이 되면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나가 용돈을 벌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한 최재하 체육 교사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전문적인 축구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는 책을 보고 전술을 공부하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하나로 오전에는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공을 차고 밤 늦게까지 일을 했던 학생들은 최재하 교사가 부임하자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강팀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1949년 대한체육대회에서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하며 고교 축구 최강팀 자리에 우뚝 섰다. 아픔을 겪기도 했던 강릉농고 축구부의 우승에 학교 동문들과 학부형들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최재하 교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 다음 목표는 학도호국단 체육대회 우승이다.”
6.25 전쟁으로 서울 시내 건물이 불타고 있는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우승을 위해 서울로 향하다
학도호국단 체육대회는 학교체육의 진흥을 위해 열렸던 학생들의 전국체육대회였다. 비록 지금은 학도호국단 체육대회가 사라졌지만 전국소년체전을 그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학도호국단 체육대회는 최고 권위의 전국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곧 최고의 팀이라고 인정받는 길이었다. 최재하 교사는 강릉농고를 이끌고 이 대회 우승을 위해 합숙을 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는 대회가 열리는 서울로 올라갔다. 트럭에 가마니를 깔고 11시간이나 걸린 고생길이었지만 고향으로 향할 때는 우승컵을 들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회에 나선 강릉농고는 목표를 향해 순항했다. 1950년 6월 23일 열린 준결승전에서 승리해 다음날 열리는 결승전에 안착했다. 강릉농고의 결승전 상대는 한양공고를 꺾고 올라온 대구고였다. 강릉농고 선수들은 우승을 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결승전이 열리기로 한 1950년 6월 24일이 되자 조직위원회 측에서 강릉농고와 대구고에 이러한 통보를 내렸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경기 일정을 하루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고민이 많던 양 팀은 경기가 하루 미뤄지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열릴 결승전을 기대하며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동이 틀 무렵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도 없었을 때다. 강릉농고는 오로지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우승컵을 단 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북괴군이 남침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서울운동장. 예상대로 강릉농고는 시종일관 대구고를 몰아친 끝에 감격적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고 이어 벌어질 고려대와 동국대의 대학부 결승전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물러나 라커룸으로 향했다. “사실 경기 시작 전에는 긴장돼 죽는 줄 알았다”며 서로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직접 강릉에서 서울까지 응원을 온 강릉농고 이규영 교장과 학무과 직원 등 11명도 우승의 감격을 함께했다.
그런데 이때 문교부 김태식 체육과장의 연락을 받은 이유형 대회 진행위원이 급하게 본부석으로 뛰어 올라와 헐떡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북괴군이 남침했습니다. 대회를 중단합니다.” 서울운동장을 꽉 채운 관중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모두 관중석을 빠져 나가 피난 준비를 위해 집으로 향했다.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더 걱정인 건 강릉까지 가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유영 교장은 “인원이 많으면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테니 따로 움직이자”고 했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최재하 교사는 걱정이었다. 일단 숙소로 잡은 낙원동 여관으로 선수들을 돌려보낸 뒤 강릉행 차편을 수소문했지만 전쟁으로 이미 모든 교통편은 끊긴 후였다. 도무지 강릉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품었지만 이 우승컵을 고향까지 가지고 갈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던 중 최재하 교사는 학교 측으로부터 급한 연락 한 통을 받았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유영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11명 전원이 경기도 마석고개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총살됐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피난을 가는 이는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죽을 각오로 고향을 향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우승을 바랐고 또 그 영광을 함께 했던 이들이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최재하 교사를 비롯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여관 지하실에 숨어 일주일 동안 지내야 했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고향으로 가 환영을 받겠다던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잠시 지하실에서 올라와 살펴본 서울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떠난 폐허였다. 하루 하루 지날 수록 인민군의 포성은 점점 가까이 들렸다.
그러던 중 여관 할머니는 “딱한 사정은 알지만 이제 그만 식량이 떨어졌으니 나가달라”고 했다. “북괴군이 서울로 들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최재하 교사를 비롯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목숨을 내놓고 걷기 시작했다. 우승 트로피를 가슴에 품고 기약 없이 고향을 향해 걸었다. 죽을 각오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이미 강릉은 인민군이 점령했지만 그들은 고향을 두고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그렇게 걸었다.
“손 들라우.” 경기도의 한 산길에서였다.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은 무리 지어 산 속을 헤매는 건장한 남성들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강릉농고 선수들은 체념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이 우승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대로 죽는구나.’ 그때 한 인민군이 말했다. “거 가슴 속에 품은 그것 좀 꺼내보라우.” 우승컵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최재하 교사는 우승컵을 품에서 꺼냈다. “저희는 강릉농고 축구부입니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6·25, 슬프지만 잊지말자
인민군이 술렁였다. 이미 강릉농고의 축구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인민군들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동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조심히 가라우. 내래 우승컵 아니었으면 다 쏴 죽일라고 했소.” 하늘이 도왔을까. 강릉농고 선수들은 우승컵으로 목숨을 가까스로 구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더 인민군과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우승컵을 본 인민군은 강릉농고 선수들을 순순히 보내줬다. 만약 우승컵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인민군의 총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7월 12일. 그들은 서울을 출발한지 꼭 열흘 만에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강릉농고 선수들은 대거 학도병으로 자원해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최재하 교사는 강릉농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 할 때까지 학교를 지켰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릉농고가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서 따낸 우승컵은 월드컵 우승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성적이지만 그들의 이 우승컵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우승컵으로 목숨을 구한 이 절절한 이야기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대변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하루 쯤은 우리가 이 땅에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이들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footballavenue@nate.com
강릉농공고 축구부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사진=연합뉴스)
재창단 된 강릉농고 축구부와 최재하 교사
강릉농고 축구부는 1941년 창단됐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부 선수 중 일부가 일반 성인팀 소속으로 대회에 나간 게 발각돼 해체되고 말았다. 학교 내부에서도 축구부 존폐를 놓고 말이 많았지만 결국 오랜 회의 끝에 해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광복을 맞자 학교 측에서는 새 출발하는 의미로 다시 한 번 축구부를 창단했다. 1945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재창단 한 당시 강릉농고 축구부는 오합지졸이었다. 워낙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훈련은 물론 제대로 된 지도자도 갖추지 못했다. 한 차례 해체를 겪으며 학교 측의 눈 밖에 난 것도 이유였다. 선수들은 밤이 되면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나가 용돈을 벌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한 최재하 체육 교사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전문적인 축구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는 책을 보고 전술을 공부하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하나로 오전에는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공을 차고 밤 늦게까지 일을 했던 학생들은 최재하 교사가 부임하자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강팀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1949년 대한체육대회에서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하며 고교 축구 최강팀 자리에 우뚝 섰다. 아픔을 겪기도 했던 강릉농고 축구부의 우승에 학교 동문들과 학부형들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최재하 교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 다음 목표는 학도호국단 체육대회 우승이다.”
6.25 전쟁으로 서울 시내 건물이 불타고 있는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우승을 위해 서울로 향하다
학도호국단 체육대회는 학교체육의 진흥을 위해 열렸던 학생들의 전국체육대회였다. 비록 지금은 학도호국단 체육대회가 사라졌지만 전국소년체전을 그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학도호국단 체육대회는 최고 권위의 전국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곧 최고의 팀이라고 인정받는 길이었다. 최재하 교사는 강릉농고를 이끌고 이 대회 우승을 위해 합숙을 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는 대회가 열리는 서울로 올라갔다. 트럭에 가마니를 깔고 11시간이나 걸린 고생길이었지만 고향으로 향할 때는 우승컵을 들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대회에 나선 강릉농고는 목표를 향해 순항했다. 1950년 6월 23일 열린 준결승전에서 승리해 다음날 열리는 결승전에 안착했다. 강릉농고의 결승전 상대는 한양공고를 꺾고 올라온 대구고였다. 강릉농고 선수들은 우승을 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결승전이 열리기로 한 1950년 6월 24일이 되자 조직위원회 측에서 강릉농고와 대구고에 이러한 통보를 내렸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경기 일정을 하루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고민이 많던 양 팀은 경기가 하루 미뤄지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열릴 결승전을 기대하며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동이 틀 무렵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도 없었을 때다. 강릉농고는 오로지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우승컵을 단 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북괴군이 남침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서울운동장. 예상대로 강릉농고는 시종일관 대구고를 몰아친 끝에 감격적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고 이어 벌어질 고려대와 동국대의 대학부 결승전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물러나 라커룸으로 향했다. “사실 경기 시작 전에는 긴장돼 죽는 줄 알았다”며 서로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직접 강릉에서 서울까지 응원을 온 강릉농고 이규영 교장과 학무과 직원 등 11명도 우승의 감격을 함께했다.
그런데 이때 문교부 김태식 체육과장의 연락을 받은 이유형 대회 진행위원이 급하게 본부석으로 뛰어 올라와 헐떡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북괴군이 남침했습니다. 대회를 중단합니다.” 서울운동장을 꽉 채운 관중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모두 관중석을 빠져 나가 피난 준비를 위해 집으로 향했다.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더 걱정인 건 강릉까지 가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유영 교장은 “인원이 많으면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테니 따로 움직이자”고 했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최재하 교사는 걱정이었다. 일단 숙소로 잡은 낙원동 여관으로 선수들을 돌려보낸 뒤 강릉행 차편을 수소문했지만 전쟁으로 이미 모든 교통편은 끊긴 후였다. 도무지 강릉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품었지만 이 우승컵을 고향까지 가지고 갈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던 중 최재하 교사는 학교 측으로부터 급한 연락 한 통을 받았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유영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11명 전원이 경기도 마석고개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총살됐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피난을 가는 이는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죽을 각오로 고향을 향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우승을 바랐고 또 그 영광을 함께 했던 이들이 강릉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최재하 교사를 비롯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여관 지하실에 숨어 일주일 동안 지내야 했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고향으로 가 환영을 받겠다던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잠시 지하실에서 올라와 살펴본 서울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떠난 폐허였다. 하루 하루 지날 수록 인민군의 포성은 점점 가까이 들렸다.
그러던 중 여관 할머니는 “딱한 사정은 알지만 이제 그만 식량이 떨어졌으니 나가달라”고 했다. “북괴군이 서울로 들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최재하 교사를 비롯한 강릉농고 선수들은 목숨을 내놓고 걷기 시작했다. 우승 트로피를 가슴에 품고 기약 없이 고향을 향해 걸었다. 죽을 각오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이미 강릉은 인민군이 점령했지만 그들은 고향을 두고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그렇게 걸었다.
“손 들라우.” 경기도의 한 산길에서였다. 결국 인민군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은 무리 지어 산 속을 헤매는 건장한 남성들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강릉농고 선수들은 체념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이 우승컵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대로 죽는구나.’ 그때 한 인민군이 말했다. “거 가슴 속에 품은 그것 좀 꺼내보라우.” 우승컵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최재하 교사는 우승컵을 품에서 꺼냈다. “저희는 강릉농고 축구부입니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6·25, 슬프지만 잊지말자
인민군이 술렁였다. 이미 강릉농고의 축구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인민군들은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동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조심히 가라우. 내래 우승컵 아니었으면 다 쏴 죽일라고 했소.” 하늘이 도왔을까. 강릉농고 선수들은 우승컵으로 목숨을 가까스로 구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더 인민군과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우승컵을 본 인민군은 강릉농고 선수들을 순순히 보내줬다. 만약 우승컵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인민군의 총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7월 12일. 그들은 서울을 출발한지 꼭 열흘 만에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강릉농고 선수들은 대거 학도병으로 자원해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최재하 교사는 강릉농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 할 때까지 학교를 지켰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릉농고가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서 따낸 우승컵은 월드컵 우승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성적이지만 그들의 이 우승컵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우승컵으로 목숨을 구한 이 절절한 이야기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대변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 61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하루 쯤은 우리가 이 땅에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에 목숨을 바친 이들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footballavenu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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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모두가 알아야할 정말로 소중한 자료를 주셨습니다.
수년전에 사려져가는 모교 축구사를 재조명하고 넓게는 학원 스포츠에 대한 교육사적
접근이 절실하다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팀을 구성하고 녹취에 필요한 mp3기까지 구입하는 등
노력은 했지만 결국 여러가지 여건 부족으로 미수에 그치고만 뼈아픈 경험을 떠올려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동문님의 소중한 자료를 접하게 되어 그지없이 고맙고 반갑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들을 올려 주시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